Studio COM «시티 코르타니아»

studio com

—제작 및 기획 윤율리 / 포스터 모조산업 / 설치도움 쿠, 이희진, 이천성 / 케이터링 고밑애

 

씨오엠 (2015-)

  • 공간 및 디자인 스튜디오
  • 2014 국민대학교 공간디자인과 졸업 (김세중)
  • 2013 한국예술종합학교 무대미술과 졸업 (한주원)

개인전

  • 2017 «시티 코르타니아», 아카이브 봄, 서울

단체전

  • 2016 «공간의 발견», 경기도미술관, 안산
  • 2016 «set v.5»(협업 김영나), 지산 밸리록 페스티벌, 이천
  • 2016 «풋업 앤드 리무브»(협업 배민기), 플랫폼 플레이스 홍대, 서울
  • 2016 «그래픽 디자인, 2005~2015, 서울», 일민미술관, 서울
  • 2015 «타이포잔치 2015», 문화역서울284, 서울

전시/무대디자인

  • 2017 «SeMA 전시 아카이브 1988-2016: 읽기 쓰기 말하기», 서울시립미술관, 서울
  • 2016 «변칙 판타지»(연출 정은영), 남산예술센터, 서울
  • 2016 «예술가의 문서들: 예술, 타이포그래피, 그리고 협업», 국립현대미술관, 서울
  • 2016 «미디어시티서울 2016» 내 '더 빌리지', 서울시립미술관 남서울, 서울
  • 2015 «XS: 영 스튜디오 콜렉션», 우정국, 서울
  • 2015 «파빌리온씨», 아르코미술관, 서울

아카이브 봄을 용산으로 이전하면서 여러 작가들의 도움을 받았다. 특히 건물 1층에 작품의 수집과 진열, 판매를 겸하는 서비스룸을 오픈하며 많은 수량의 가구가 필요했고 COM을 통해 큰 나무 책장과 스툴을 제작할 수 있었다. 한쪽 벽면에 등을 기댄 채 사용자를 정면으로 바라보는 이 책장을 어디까지 입체라 부를 것인지에는 이론의 여지가 있겠지만, COM의 작업공정은 평면에서 떼어낸 조각으로 입체를 조형하는 괜찮은 방식으로서 나의 호기심을 자극했다. 조각가들의 사뭇 진지한 노력과는 전혀 다른 충동으로, 오로지 기술적인 취약점을 보완하기 위해 극단적으로 제고된 효율성을 무기 삼아, 이 듀오는 형태라는 결착을 향해 직진! 또 직진!하며 자연스레 화면과 세계 사이의 절단면을 흔적으로 남기는 역방향 모델링을 구사하고 있었던 것이다. 

        전시를 확정하고 몇 번의 만남을 가지며 나는 비로소 그들의 작업이 집중적으로 시각화하는 특이한 양식들의 혼재를 면밀히 살필 수 있었다. 커팅 방식에 따른 곡면을 특징있게 보여주면서도 정확한 간격으로 복제되는 직선의 운동감. 이름을 일일히 다 나열하기 어려운 유럽의 건축사조가 이리저리 혼합된(전혀 거리낌 없이 그에 대한 선입견, 주관적 감상을 드러내는) 뭐 그런 서울의 맛이랄까. 조금 더 시간이 흐른 뒤에 알게된 이 작업의 내막은 같은 연장에서 대단히 매혹적이었는데, 내가 도록을 수집하고자 주문한 책장이 실은 어딘가에 존재하는 빌딩의 형태를 거의 그대로 본뜬 것이며, 그 원본 이미지는 동덕여대인지 덕성여대 아무튼 그 근처를 지나던 택시 안에서 직접 촬영한 스냅이었다는 사실이다.

 

가상의 도시 코르타니아는 그런 이유에서 이 전시가 출발하는 시작점이 되었다. 우리가 이 도시(혹은 전시)를 만드는 방식으로 합의한 것은 크게 두 가지다. 첫 번째는 코르타니아의 지리, 기후, 인종, 문화적 풍습 따위를 가능한 자세히 상상하고, 이에 연관되어 있음직한 도시의 건축물-오브제를 디자인하자는 것. 두 번째 약속은 보다 미묘해서, 우리는 각자의 디테일에 대해 가급적 함구한 채 가타부타 쓸데없는 질문을 늘어놓지 않기로 합의했다. 이것은 기획자와 작가 사이에 또 작가와 작가 사이에 느슨한 유격을 틈입시키기 위한 제안이었다. 그러므로, 결과적으로 우리는 서로 다른 별자리를 믿는 옛 뱃사람들처럼 각각의 코르타니아를 향해 가며, 그 항로의 다름으로 구획되는 해도 위의 면적을 통해 코르타니아를 진술하게 되었다. (COM을 초대하기 전 염두했던 키워드가 ‘오리가미’였음을 생각하면 이것은 꽤 큰 폭의 변화다.)

        나의 경우를 말하자면 다음과 같다. 이 도시의 이름 코르타니아Cortanea는 고어 콜렉타네아collectánĕa가 변형된 어느 사투리로부터 비롯했다. 이 도시는 해안가에 세워졌으며, 때문에 고대 도시국가 시절부터 적을 감시해 온 첨탑이 긍지 높은 선조들의 유산으로 남겨졌다. 이 도시에는 가면을 쓰고 축제를 즐기는 전통이 있다. 평시에 그 가면들은 길쭉한 보관함에 거치된다. 이 도시의 시민들은 중소규모 단위로 밀집된 주택에 거주하는데, 이들은 주로 대륙의 남부에서 유입되었으므로 주택의 외형은 그 조상 중 가장 유명한 건축가를 기리고 있다. 이 도시는 과도기적인 왕정을 채택한 것으로 알려졌다. (둥근 왕좌를 처음 보았을 때 나는 200개의 칼을 녹여서 만들었다는 어떤 드라마 속의 의자를 떠올렸다.) 이 도시의 가장 높은 곳엔 신전이 위치해 있다. 그 양식의 모티브는 유일신을 섬기는 문명들에서 흔히 발견되는 것이다.   

 

끝으로, 전시의 출입로인 옥외에는 COM의 시그니처와도 같은 스툴이 올려졌다. 사실이거나 사실이 아닌, 혹은 동의를 기다리며 유예되는 비스듬한 사실들 틈에서 이것은 아무래도 더 분명히, 각기 다른 현대조각의 거장 두 명을 떠올리게 한다. 이 작업은 아카이브 봄이라는 현실과 코르타니아라는 가상, 누군가의 엉덩이를 기다리는 의자와 기념비적 조각이라는 의미의 틈새에서 ‘트로피’라는 제법 귀여운 이름을 가지게 되었다. 물론 COM은 이것이 그저 조금 높은 스툴일 뿐이라고(또는 뒤집혀 세워진 스툴일 뿐이라고) 주장할 것이다. 실제로 믿을만한 증언에 의하면, 키가 무척 큰 코르타니아인이 이곳에 앉아 여름밤의 먼 하늘을 바라보는 모습이 종종 목격되고 있다.

♢ 윤율리


박보마 개인전 «화이트의 가짜 노력 유리 에메랄드 프리 오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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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작 및 기획 윤율리 / 포스터 박보마 / 케이터링 고밑애

 

박보마 (b.1988) / fluff studio (2014-)

  • 2013 한국예술종합학교 조형예술과 졸업

개인전

  • 2017 «화이트의 가짜 노력, 유리 에메랄드 프리 오픈», 아카이브 봄, 서울

단체전

  • 2017 «Shame on You», 두산갤러리, 뉴욕
  • 2016 «1, 2, 3, 4, 5, 6», 갤러리 175, 서울
  • 2016 «룸 프로젝트: BCSMOFSLSM fldjf», 아트선재 오프사이트, 서울
  • 2016 «VOID: 요람에서», 국립현대미술관, 서울
  • 2016 «비디오릴레이 탄산», 서울시내 모처, 서울
  • 2016 «SILKY NAVY SKIN», 인사미술공간, 서울
  • 2015 «/documents», 시청각, 서울
  • 2015 «수정사항», 교역소, 서울
  • 2015 «골든 에이지», 레인보우 큐브 갤러리, 서울
  • 2014 «B Painting», 갤러리 175, 서울

워크숍 & 프로그램

  • 2015 인사미술공간, 신진작가 워크숍
  • 2013 아트인컬처, 동방의 요괴들 300인 선정
  • 2012 브레멘 예술대학, 교환 프로그램 (Korpys & Löffler Studio)

그대를 스쳐 반짝이며 강물 흐르는 곳에 /숲속의 새가 나무의 정수리를 넘어 날듯이 / 힘차게 나는 듯 다리 걸쳐 있고 / 마차와 사람들도 그 다리 울리고 있네

Wie der Vogel des Walds über die Gipfel fliegt / Schwingt sich über den Strom, wo er vorbei dir glänzt / Leicht und kräftig die Brüke / Die von Wagen und Menschen tönt1

 

언젠가 추상의 세계에 매료된 적이 있다. 그 세계는 다양한 명사들의 목록으로 만들어진 진열장이었고 난폭하며 동시에 매혹적인 힘으로 가득했다. 사랑, 죽음, 시작, 끝 같은 단어가 손가락의 압력을 통과해 화면에 놓일 때, 언어는 세상에서 쉽게 찾아볼 수 없는 완전함의 일부를 제 속에 지닌 듯 했다. 명사의 세계는 아름다운 만큼 바짝 말라 있었다. (흐릿한 추상명사의 긴 나열을 읽고 쓰는 일은 그것대로 얼마나 피로한 일인가?) 비록 긴 시간은 아니었지만 내가 몸담은 미술의 세계도 대체로 비슷해서, 때로 그곳은 속이 텅 빈 밀랍인형들로 채워진 엄숙한 박물관처럼 느껴졌다. 물론 나를 경도시켰던 명사의 세계가 특별히 선하거나 악하거나 더 위대하거나 속물적이었다고 말할 수는 없다. 좋든 싫든 A와 B, B와 C 사이에 질서를 구획하는 일은 언제나 마술적인 권능, 근원적인 폭력을 필요로 했으므로.

        어느날 횔덜린의 시구가 스치고, 반짝이고, 흐르며, 구체적인 물질로 나아가는 것을 보았을 때, 나는 이상한 해방감을 맞닥뜨렸다. 동사의 세계는 생경한 모습으로 날아오르고 있었다. 동사의 세계에서 주어가 될 수 없는 말의 서자들은 울리다tönt를 발음하는 순간의 혀처럼 둥글게 말리고 펴졌다. 얇게 펄럭이는 종이의 오른쪽 모서리를 구겨 접으며 나는 가장 먼저 박보마를 떠올렸다.

 

기억을 더듬어, 박보마를 처음 알게된 것은 2015년도 ‘비디오 릴레이 탄산’의 프로그램을 통해서다. (페이스북에서 fldjf studio의 계정을 본 기억이 있지만, 그저 조금 실험적인 미감의, 금방 사라지고 말 디자인 스튜디오일 거라 생각했다.) 박보마는 당시 <Villa-A>라는 작업을 선보였는데, 가상의 지중해 빌라에 대한 정보를 웹사이트에 업로드한 후 초대장을 소지한 참여자들에게 이를 소개 및 안내하는 방식이었다. 돌이켜보면 박보마에게 중요한 것은 인터넷이라는 접속경로가 아니라 지중해를 가득 매운 코발트 블루, 그리스의 외딴 화산섬을 연상시키는 연한 회색의 빛이 투명하고 매끈한 스크린 아래, 반짝이는 다이오드와 함께 누군가를 유혹하는 것이었을 테다. (탄산이 진행된 현장에서는 주로 웹 형식이 관객의 시선이나 동선을 구획하는 법에 대한 질문들이 오갔다.)

        «굿-즈»(세종문화회관, 2015), «서울 바벨»(서울시립미술관 서소문, 2016)에서의 만남을 거쳐, «SILKY NAVY SKIN»(인사미술공간, 2016)은 내가 그에게 관심을 가지게 된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다. «굿-즈»와 «서울 바벨»의 박보마가 물질이자 반사체가 되는 dancer qhak으로 스스로를 출품했다면, «SILKY NAVY SKIN»에서 나는 물질의 배합을 통해 특정한 목적을 실현하는 광고 회사 fldjf studio의 잠재적인 클라이언트가 될 수 있었다. 나는 ‘고객’으로서 그간 내가 사용해 온 언어와 '회사'의 언어가 거의 일치하지 않음을 느끼고 그의 단어를 수집해 정리하는 것으로부터 작업을 시작했다. 번역이라는 상호적 통로로 나의 말이 그에게 끌어당겨졌을 때 맛본 자유로움은 대단히 짜릿하고 흥미로운 것이었다. 요컨대, 박보마의 작업을 이해하는 가장 쉬운 방법은 boma라는 최상위의 계정에 혼재해 있는 요소들을 추출해 다시 임의의 표 안에 정렬해 보는 것이다. 박보마가 작가로서 제시하는 키워드는 (dancer qhak과 fldjf studio의 경우처럼) 특정한 구조적 위계를 가지고 몇 가지 조합으로 반복된다. 가령 이것을 도식화하면 [기분/하늘]->{빛}, [반사체/광고]->{몰딩}, [우연/그라데이션]->{샘플}과 같은 알고리즘의 순서도가 나타난다. 박보마는 이 요소들의 혼합을 통해 본래 그렇게는 존재하지 않도록 약속된 것, 그럴 수 없도록 명령된 것, 다르게 표현하면 추상의 세계에서 금지당한 어떤 물리적 상황/상태를 표면 위로 적출한다.

 

박보마에게 난해하다거나 ‘완결되지 않은 듯' 하다는 수식이 뒤따르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그의 작업은 미술의 오랜 명사적 관습으로부터 달아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의 관심사는 사물을 표현하거나 설명하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사물이 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이것을 페미니즘적인 미술이라 불러도, 시간에 대해 특정적인 미술이라 불러도, 신체로 구현되는 웹아트라 불러도 실은 아무 상관 없을 테다.

        이 도록에는 박보마의 이번 전시 «화이트의 가짜 노력, 유리 에메랄드 프리 오픈»을 해설하기 위한 몇 가지 제안들이 수록되어 있다. 다섯 명의 조력자들은 각각 언어 바깥에서 환유되는 다른 감각을 제시하고(김소라, 송보경, 레베카 손), 다른 말하기의 방식을 고안하고(방혜진), 작업 프로세스의 일부를 특정한 개념으로 안전하게 전환하며 그에 대한 매뉴얼을 제시한다(김뺘뺘). 

        자, 회사는 묻는다. 이미지는 얼만큼 질긴가? 황금과 황금빛이 어떻게 다른가? 춤꾼이 답한다. 결과물은 기포inclusion같은 것이다! 우리는 모두 사라지길 원한다!2

♢ 윤율리

 

  1. 프리드리히 횔덜린, 「하이델베르크」, 1798.
  2. 박보마, 「about fldjf & qhak」 - https://fldjfs.wixsite.com/qhak/about

박정혜 개인전 «Dear. Drop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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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작 및 기획 윤율리 / 초대기획 김정현 / 포스터 모조산업 / 케이터링 고밑애

 

박정혜 (b.1989)

  • 서울에서 작업 및 거주
  • 2013 홍익대학교 회화과 졸업

개인전

  • 2016 «Dear. Drops», 아카이브 봄, 서울

단체전

  • 2016 «Twin Peaks», 하이트컬렉션, 서울
  • 2015 «오토세이브: 끝난 것처럼 보일 때», 커먼센터, 서울
  • 2015 «굿-즈», 세종문화회관, 서울
  • 2015 «평면탐구: 유닛, 레이어, 노스텔지어», 일민미술관, 서울
  • 2014 «오늘의 살롱», 커먼센터, 서울
  • 2012 «Spring Water», 2012 부산비엔날레 '배움의 정원', 부산진역, 부산

아카이브 봄은 사간동에서 6년, 와룡동에서 2년의 시간을 보냈다. 그 다음 1년은 부동산 등기부등본 속에만 존재하는 상태로 육신 없이 몇 군데의 전시장과 미술관을 떠돌았다.

        첫 번째 봄은 한옥이었다. 한때 ‘진짜 한옥’이던 그곳은 일제시대와 새마을운동을 거치며 개량을 거듭해, 가령 입식에 알맞은 높이의 창문과 시멘트 벽, 투명 우레탄이 발린 작은 마당을 가지고 있었다. (전주한옥마을에 가면 이런 이상한 집들 앞에서 사진을 찍는 관광객들을 아주 많이 볼 수 있다.) 이걸 어디까지 한옥이라 부를 수 있을진 모르겠지만, 아무튼 이 집은 여러 사람이 모여 워크숍을 열거나 공연을 하기에 적합했다. 건축이라 할만한 것이 완전히 무화된, 결코 아름답지 않지만 그렇다고 딱히 나쁘다고 말할 필요도 없는, 이 풍경은 그 속에 모인 이들을 둘러치는 괄호einklammerung 같았다.

        두 번째 봄은 창덕궁 앞에 있는 현대식 빌딩의 4층에 자리잡았다. 소방법이 바뀌며 한쪽을 잘라내어 약간 작아진 건물이라고 했다. (그것이 어떻게 가능했는지 모르겠다.) 비어있는 벽과 평평한 바닥을 가지게 되었기 때문에 이곳에서는 비로소 전시를 기획할 수 있었다. 선택의 여지가 많지 않았기에 사무실 천장의 석면을 뜯어내고 바닥에는 에폭시를 칠했다. 그것은 특정성이 아니라 그 반대를 위한 것이었다. 전형적인 것이 될 수 없다면 낯선 것이 되어야 했으므로.

        그러니까 지금 이곳은 아카이브 봄의 세 번째 버전쯤 된다. 세 번째 봄이 (전시를 위한) ’공간’이라는 물질의 차원에서 구상한 것은 다음과 같은 것들이다.

 

  1. 단일한 면적이 작아지더라도 층으로 여러 조건을 구획한다.
  2. 전시는 지상층에서 이루어진다.
  3. 건축물이 태생적으로 지닌 휴먼스케일을 보존하되 동선이나 기능은 마음대로 부순다.
  4. 전시에 방해가 될 만한 모든 요소를 단정하게 정리한다.
  5. 그러나 내부를 인공의 큐브로 만들지는 않는다.

 

요컨대 사간동 봄을 떠나며 가짜 한옥이 지겨웠던 것과 마찬가지로 나는 가짜 폐허가 지루해졌고, 이제는 조금 다른 걸 해보는 게 좋겠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어쩌면 더 이상 유예적인 방식으로 지속되기 어렵다는 (‘유예’의 마지막 효용이 생명을 다했다는) 예감이 스쳤던 것일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다섯 번째 조항을 하나의 지침으로 삼은 것은 굳이 미술관 바깥에서 그것을 열화된 품질로 흉내내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물론 이 결정들은 많은 부분 그때그때의 현실과 우연에 기대었다. 좋은 결과란 언제나 좋은 직관과 함께 찾아지는 법이라 믿으며.

        마지막으로, 나는 아카이브 봄이라는 물질이 염두하는 문제들과 가장 먼저 맞부딪힐 회화 작가를 물색했다. 회화는 어디에나 있어 왔고, 가장 오래된 미술이며, 그 전통의 첫 번째 배신자였다. 그런 점에서 회화는 한 방울의 요오드 용액이다. 미술관도 임대공간도, 큐브도 폐허도 아닌 이곳에서 회화는 어떤 운명에 처할 것인가? 과거의 흔적과 현재의 스킨이 혼재된 어딘가에서, 패턴과 솔리드 사이의 평면 어디쯤에서, 박정혜라면 그의 작업을 통해 앞선 모든 질문을 전시라는 형태로 간결히 압축해 줄 것이다.

♢ 윤율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