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 공산당선언 <1> 김범석

1. 부르주아지와 프롤레타리아트

    먼저 부르주아지와 프롤레타리아트에 대한 개략적인 정의를 보자. “부르주아지는 사회적 생산 수단의 소유자이며 임금 노동을 착취하는 근대 자본주의자 계급으로 이해된다.” 반면 “프롤레타리아트는 근대 임금 노동자 계급을 말하는데, 이들에게는 자신의 생산 수단이 없기 때문에, 살기 위해 자신의 노동력을 파는 일에 의존한다.” 이는 근대 이후 자본 사회의 대립되는 두 계급이다. “이제까지 사회의 모든 역사는 계급투쟁의 역사이다.”라고 칼 마르크스는 말한다. 이에 조금 덧붙이자면, 마르크스는 사회 구조를 크게 하부구조와 상부구조로 설명한다. 하부구조란 물질적 토대, 생산관계, 경제적 구조를 말하고, 상부구조란 하부구조를 통해 생성되는 법, 정치, 예술, 문화, 정신, 삶의 양식 등을 말한다. 가령, 봉건사회와 자본주의 사회를 예로 들어보자. 봉건사회에선 농노와 평민계급 등과 그 위에 귀족, 영주, 군주, 등이 존재했다. 이러한 사회에서의 하부구조로서, 생산과정을 보면, 항상 귀족 및 군주계급이 농노 및 평민계급에 대한 착취를 통해 삶을 영위하고, 사회를 유지한 것이다. 그리고 이를 뒤엎으며 부르주아지가 봉건 시대의 시민계급으로서 혁명을 일으켰다. 그러나 마찬가지로 근대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부르주아지 계급이 자본과 토지를 이용하여 임금 노동자계급인 프롤레타리아의 임금을 조정하는 방식으로 착취를 행하는 하부구조를 갖는다. 이러한 계급간의 대립을 통해 각기 사회의 고유한 생산방식이 정해졌고, 착취하는 시스템은 유지되어왔다. 그렇기 때문에 마르크스는 모든 역사를 계급투쟁의 역사로 규정한 것이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부르주아지는 봉건시대의 평범한 도시 시민, 상인계급으로부터, 군주에 대한 혁명을 일으킴으로써 본인들의 지위를 격상시켰다. 그와 동시에 자신들이 가지고 있던 경제적 부를 이용하기 시작했고, 자본과 토지를 무기로 하여금, 또다시 임금 노동자를 착취하기 시작한 것이다. 기존 봉건사회에 존재하던 가내 수공업, 장인을 통한 길드 및 조합, 공장제 수공업 등은 낡은 생산시스템으로 전락하고, 부르주아지는 자신들이 기득권을 잡음과 동시에 증기, 기관을 이용한 공장의 기계와 노동자를 생산수단으로 삼기 시작했다. 

    이런 자본 시스템은 거대해지는 경향을 갖는다. 그런데 그 과정에서 경쟁과 착취가 필연적으로 동반한다는 것이다. 즉, 소 자본가는 기계와 토지를 이용해 임금 노동자를 착취하고, 그렇게 축적된 소 자본가의 자본은 또다시 대 자본가의 축적된 자본에 의해 경쟁에서 도태되어 다시 프롤레타리아트 계급으로 전락하게 된다. 이렇게 끊임없는 순환 속에 결국 살아남는 것은 몇 개의 대 자본이며, 극명한 두 계급 간 대립으로 사회는 치닫게 된다. 이는 다양한 방식으로 진행되는데, 세계적인 수준으로, 타 국가에게 거대한 자본의 위협이 가해져서 문호를 개방하게끔 하고, 농촌은 도시에, 소국가는 대국가에, 동양은 서양에 종속되는 흐름을 보인다. 결국 모든 것이 ‘착취’의 흐름 하에 흘러가는 것이다. 이러한 흐름 속에 프롤레타리아트는 형성된다. 부르주아지는 임금 노동자들이 삶을 영위할 수 있을 만큼의 최소한의 임금을 제공한다. 따라서 부르주아지의 부가 늘어남에도 불구하고 임금 노동자의 삶은 항상 최저 수준을 벗어날 수 없는 것이다. 이 부분에선 여타의 언급이 있진 않았으나, 노동의 본질은 그 가치를 상실하는데, 노동자가 자신의 노동을 통해 자본을 생산함에도 불구하고, 그렇게 생산된 결과물들은 임금노동자와 아무런 관련이 없는 곳으로 돌아가며, 정작 자신이 생산을 했음에도, 생산물과 어떠한 직접적인 관계도 맺지 못하는 것이다. 포드주의가 그 대표적인 사례로, 임금 노동자는 기계식 생산라인에 갇혀 각기 맡은 영역에서 자동차 문을 붙이거나, 바퀴를 장착하는 일을 분업하여 도맡는다. 그러나 자동차는 노동자가 아닌 알 수 없는 소비자에게 돌아가고, 소비자 역시 노동자가 누군지 알 수 없다. 즉, 노동의 가치는 자본주의 시스템 하에서 그 의미를 상실하는 것이다. 이렇게, 노동의 가치에서, 또한 임금의 문제에서, 착취 등의 이유로, 프롤레타리아트의 삶은 유린되어가며, 그렇게 계급투쟁을 감행하게 되는 것이다. 

2. 프롤레타리아와 공산주의자

    공산주의자는 “프롤레타리아 계급의 공동 이해관계를 강조하고 관철하는 한편, … 항상 전체 운동의 이해관계를 대변한다.” 즉, 프롤레타리아의 초국가적 집합으로 볼 수 있다. 그리고 이들은 사적 소유를 폐지하라고 권한다. 부르주아지는 소유와 자유를 결부시켜서, 소유의 철폐는 자유를 내어주며 과거로 회기 하는 것이라 한다. 그러나 정작 중요한 것은 자본주의 시스템에서의 소유는 부르주아지의 것이며, 프롤레타리아의 것이 아니었고, 자유 또한 차등적 소유에 의해 제한받는 것이었다. 그리고 사적 소유화 된 자본을 사회의 소유로 돌림으로써, 자본주의의 계급적 성격이 상실되고, 평등한 자유가 가능하다고 한다. 임금 노동에 있어서, 마르크스는 이렇게 말한다. “우리는 다만 이런 취득의 비참한 성격을 없애고자 하는 것이다. 이런 취득 방식 속에서 노동자들은 자본을 증식시키기 위해 살 뿐이며, 지배 계급의 이해관계가 요구하는 정도로만 살아간다.” “공산주의는 어떤 사람에게서도 사회적 생산물을 취득할 권력을 빼앗지 않는다. 다만 그것은 이 취득을 통해 타인의 노동을 자신에게 예속시키려는 권력을 빼앗는 것이다.” 이러한 논의를 걸쳐, 결국 공산주의가 원하는 것은 계급 대립과 착취의 철폐이다. 고대, 중세, 봉건, 자본주의 사회 시스템 모두가 계급 대립을 전제로 하는 착취의 생산구조, 하부구조 속에 존재해왔다. 그리고 공산주의는 사적 소유를 비롯한 계급 대립 요소들을 폐지하고, 생산 수단을 모두가 평등하게 공유하는 사회를 만들고자 한다. 

    물론 이러한 마르크스의 사상을 현대 사회에 고스란히 적용하기 힘들지도 모른다. 그 당시엔 봉건사회가 막을 내리며, 도시 시민계급이 부르주아지로 지위가 상승됨에 따라 정치적인 과도기였다. 또한 경제적으로 기계식 산업 혁명이 도입됨에 따라 경제적으로도 부르주아지와 프롤레타리아 간의 이분법적인 계급 대립이 존재했다. 그러나 지금 사회는 정치적, 경제적으로 다양한 계층들이 사회의 구성원으로서 살아간다. 동시에 제도적인 정비도 과거 혁명기에 비해 어느 정도 보장되어있다. 그래서 우리가 경계해야할 것은 ‘어느 정도’라는 것 아닐까 생각한다. ‘어느 정도’ 제도적으로 보장되어 있거나, ‘어느 정도’ 괜찮은 계층에 속하면, 우리는 바로 함구한다. 그리고 되려 자신들의 삶이 힘들어서 투쟁을 하는 사람들에게 비난의 화살을 보낸다. 분명히 자본도, 토지도, 전문적인 자격도 보장되지 않은 사람들이 많건만, 어느 누구도 마르크스의 프롤레타리아처럼 움직이고 권익을 보장받으려 하지 않는다. 이율배반적인 모습에 대해 생각해보아야 하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