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 장자, 내편 - 응제왕 <4> 하상현

1. 원형이 있다.

    「장자」는 자유에 대해 계속해서 말하는 것처럼 보인다. 자유는 무언가의 구속에서 벗어남을 뜻한다. 그렇다면 장자가 말하는 인간상은 더 자유로운, 모든 속박에서 벗어나 행동이 자유로운 상태일까? 책 전반으로 봤을 때 이 자유의 상태는 그 자체가 목적이라기보다, 인간 본연의 상태로 회귀하는 것에 따라오는 본래의 성질이다. 장자의 곳곳에서 도는 ‘~이 아니다.’라는 부정의 어휘로 도를 설명하는 것을 볼 수 있다. 이는 원형을 방해하고 있는 본래 자연스럽지 못한 구조들, 의식들을 제거하여 원형 그 자체를 보이려는 시도들이다.

    소요유에서는 붕새와 매미같이 서로 다른 개체들이 상이한 위치에서 서로를 바라보고 있다. 이를 통해 개체마다 자유의 정도(원형을 회복한 정도)가 다르다. 그러므로 장자는 어떠한 방향성과 가치로 회귀하는 것을 생각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이러한 원형의 회복은 일상적인 상식으로는 무엇인지조차 알아차리지 못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일상적인 상식이라는 것 자체가 원형을 가리고 있는 인식의 틀이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열린 시각이 필요하며, 소요유에서는 그러한 열린 시각의 예를 허유와 신인이 명예를 추구하는 시각에서 벗어남과, 물건의 쓰임을 보는 벗어난 시각을 통해 말해주는 것이다.

2. 원형은 구분이 없다.

    구분 없음의 가장 첫 째 되는 단계는 ‘옳고 그름’이 없는 것이다. 앞서 장자가 어떤 가치로 회귀하는 것을 생각한다고 했을 때, 가치란 좋은 것과 나쁜 것의 구분이라고 생각하기 쉽다. 여기서 나는 개념화로써의 구분과 ‘원형 자체’를 다르게 봐야한다고 생각한다. 먼저 장자가 왜 구분을 부정했는지 의도를 아는 것이 중요하다. 소를 가지고 말이 말이 아님을 밝히는 장을 보면 전자의 말은 전체성 속에서의 말이고 후자의 말은 개별체로써의 말이다. 이 두 가지 말을 볼 때 인식의 차이를 보면 개별화도니 말에서 원형을 가리는 굳은 의식을 느낄 수 있다. 그에 반해서 전체성속의 말을 볼 때는 무한한 변화의 가능성으로 그것을 바라보게 된다. 장자는 이 후자의 시선이 원형에 가깝다고 느낀 것이다. 개념화(구분)는 사물을 확정지어서 다루기 쉽게 하는 것이 특징이다. 장자는 그런 굳은 일방적인 잣대가 사물, 세상의 원형의 무한한 가능성을 제한한다고 본다. ‘변화하는 인간’이라는 시선으로 볼 때, 비개념화는 하나의 덩어리 속에서 변화된 정보를 넣는다. 물을 보며 ‘이것은 물이다.’라고 생각하는 것이아니라 ‘이것은 이것이다.’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나중에는 언어로 생각하지 않는다.) 카테고리가 없는 상태에서 ‘물’은 존재하게 되며, 전체에서 상호작용하게 된다.

    영어의 is를 봐도 구분이 잃게 하는 무언가가 있다는 것을 간접적으로 알수 있다. is는 ‘있다’라는 존재와 ‘이다’라는 성질을 동시에 서술하는 동사이다. 즉 존재-성질인데, 한글로는 이런 동시적인 개념을 표현하기에 어렵다.(그렇기에 그런개념을 가지기가 어렵다.) 마찬가지로 장자의 생각에서 존재는 당위, 아니, 원형은 당위 이다. 원형-당위라는 이 동시적인 개념은 옳고 그름을 구분하는 것에서 벗어나는 것이다. (이것은 순환논증에서도 벗어난다.) 인격적인 차원에서도 옳고 그름을 가리는 것이 어떤 폐해를 가지는지 알 수 있다. ‘도’를 깨달은 사람이라면 그것을 들어내지 않는다는 말이 있다. 시비를 가리려는 마음자체, 자신의 깨달음의 높음을 인식하는 것, 들어 내려하는 것 자체가 그 인격을 파괴하기 때문이다. 이는 마치 자신의 몸속을 들여다보기 위해서 몸에 칼을 대면 피가 나오는 것과 같다. 몸을 확인하려하지 말고 몸 자체, 전체를 있는 그대로 느껴야 한다.

    그런데 몸에 칼을 대지 않고 그 자체를 느낀다는 말은 몸이 없다는 말과 다르다. 옳고 글므을 분별하지 않는 다는 말이 원형-당위가 없다는 말과 다르다. ‘재물론 2-9, 말을한다는 것은’을 보면 이것이 잘 들어난다.

도가 무엇에 가리어 참과 거짓의 분별이 생긴 것 일까? 참말은 무엇에 가리어 옳고 그름의 차이가 생긴 것 일까? 도가 어디로 사라지고 없어진 걸까? 참말은 현란한 말장난에 가리었다. 그리하여 유가와 묵가가 시비를 다투어 한쪽에서 옳다하면 다른 쪽에서 그르다하고, 한쪽에서 그르다하면 다른 쪽에서 옳다 하는 것이다. 이들이 그르다하는 것을 옳다하고 옳다하는 것을 그르다하려면, 무엇보다 이들의 옳고 그름을 초월하여 모든 것을 꿰둟어 볼 수 있는 밝음이 있어야 한다.

    참말은(원형-당위, 도) 현란한 말장난(시비, 옳고그름분별, 구분)에 가리었다. 장자는 이들이 옳다하는 것을 그르다하고, 그르다하는 것을 옳다 하려면 밝음이 있어야한다고 한다. 결국 원형의 깨달음을 얻은 자는 (불필요하게 분별하는 것에 주의하겠지만) 그들이 옳다하는 것을 그리다 할 수 있다는 말이다. 하지만 이것이 그렇게 중요하지는 않다. 중요한 것은 옳고 그름을 초월한 모든 것을 꿰뚫어보는 밝음이 있다는 것이다. 2-29, ‘논쟁이 되지 않음은’에서 이러한 원형이 무엇인지 따질 수 있는가에 대한 문제가 나온다. 장자는 이런 시비를 가리는 것으로 원형이 무엇인지 알아내길 기대하는 것은 기대하지 않는 것과 같다고 한다. 그렇다면 오강남의 주석처럼 보편타당한 객관적인 기준은 없다는 말일까? 하늘의 고름으로 조화시키고 이는 변론할 여지가 없다는 말로 보았을 때, 객관성이 없다기 보다. 인간의 한계로 그 객관성을 가려낼 수 없으니 자연스럽게 흐르는 대로 내버려두고 구경하는 경지가 낫다는 것을 말하는 것 같다. 이 원형을 깨닫기 위해서 열린 시각, 계란에서 RO고 나오는 것 같은 깨달음이 필요하다. 계란 속에 살 때 그곳이 편안하고 즐거웠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정작 그것을 깨고 나왔을 때 그 안에서의 일은 꿈에서 술을 마시며 즐거워 했던 사람이 아침에 섭섭해 우는 것과 같이 될지도 모른다. 나비와 장자의 꿈에서 장자가 나비꿈을 꿧다가 깨어난 뒤 다시 나비가 장자꿈을 꾼다고 깨달았따. 계란에서 깨고나온 뒤 다시 그 계란안에 원형이 있음을 발견하고 다시한번 계란을 깨고 나간 것이다. 이런 꿈에서 깨는 예와, 사물의 무한한 변화가능성을 볼 때 원형은 고정된 실체가 아니라 이러한 변화 자체가 원형의 모습인 것 같다.

3. 원형은 변화의 원리 혹은 변화 그 자체이다.

(끝, 이후는 산발적으로 적어놓은 것들을 모은 것이다.)

옳고 그름의 겉 껍데기는 변한다. 변하지 않는 원형 도의 원리(변화한다)를 깨닫는 것이 중요하다. 기독교 성서에서 율법에서 자유로워진다는 표현이 이것이다. 옳고그름에서 자유로와 그 변화의 원형을 이해하고 행동하는 것이다. 즉 어떤 행동을 옳고 그르다하는 것과 원칙 그 자체가 아님을 아는 것은 다르다. 겉 껍데기이자 구분인 옳고 그름을 제하고 원형을 말하는 것 뿐이다. 어떤 것을 말할 때 원형인지 불필요한 구분인지 아는 법은? 객관적으로는 없다. 직관이다. 옳고 그름은 양분하는 것이다. A이면 not A는 참이 아니다. A이면서 not A인 B, 그리고 A가아니고 not A도 아닌 그 사이의 섬세하며 무한한 가능성들을 무시한다. 이런 속성 때문에 도를 가리운다. 도, 원형은 더욱 섬세하고 역동적이게 변화할 수 있는 원리여서 옳고그름이라는 두꺼운 바늘로는 꿸수 없는 것이다.

장자가 도는 ~가 아니다 라는 형식으로 말한 것도 그런 식으로 말했을 때 가려진 껍데기 도를 묶고 있는 실을 풀어서 진정으로 풍요로운 실체 그 자체를 볼 수 있게 하기 때문이다. 반면 도가 ~다라고 말했을 때는 그 도를 지정하는 것이기 떄문에 변화에 부정적인 좁은 객체가 되어버리는 것이다. 변화를 받아드리기 어려워지고, 언어논리로 봤을 때, 변화자체가 불가능한 대상이 될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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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자를 정리한다는 것은 합당한 것인가? 먼저 모두에게 자신의 시각이 있음을 인정해야 된다. 그렇기에 이것을 정리하지 않는 다는 것은 무언가 일정치 못한 흩어진 생각만을 가진다는 것이다. 이것은 장자를 오해한 것일 수 있다. 장자의 생각이라기 보다 그 파편의 섞임으로 이해하는 것이다. 두 번쨰로 서로 의사소통을 위해 개념화와 언어화가 필요하다. 원형자체는 언어가 손가락이라 할 때 이것이다 이것이다 또 이것이다 수없이 가르킬 수 만 있는 것이지 원형 그 자체에 정의를 내릴 수 없다. 왜냐하면 정의자체가 원형이 아니기 때문이다. 도는 정의가 없음이다. 그렇다면 결국에는 직관으로 느껴야하는 무엇이다. 하지만 여전히 손가락으로 가르킬 수 있따. 언어화는 소통을 위해 그리고 손으로 도를 가르킴을 위해 도구적으로 사용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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굳어진 마음 장에서, 굳어진 마음으로 스승이 될 수 있다면 참된 덕을 가진자 뿐 아니라 그렇지 않은 자들도 스승이 된다는 것이다. 옳고 그름을 분별하는 자들이 스승이 될 수 잇느냐 하는 문제이다. 장자는 없다고 말한다. 즉 굳은 시각, 옳고 그름을 분별하는 자는 도를 모르는 것이다. 시비를 분별하는대도 도를 안다고 하면 그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라고 한다.

그러나 이 말이 모든 개념화, 언어화, 분별을 금하는 말인가? 결국에는 이글을 쓴 장자도 개념화한 것이고 분별한 것이다. 장자에 나오는 많은 도를 깨달은 사람들도 특정 개념과 언어를 가지고 이야기한다. 이경우로 봤을때도 역시 옳고 그름을 분별하는 구분과 원형을 이야기하기 위한 개념화(바름을 이야기함)는 다르다고 봐야 한다. 이것은 단순히 옳고 그름을 구분하는 것과 분명 차이를 가지는 어떤 사이, 경계의 무엇일 것이다. 전자는 확정 고정을 목적으로 하거나 그러한 성질을 가지는 것이며, 후자는 그렇지 않은 것이다. 즉 도를 아는 사람들은 옳고 그름을 시비를 가리는 것을 단순히 말하는 것과, 도-원형 그 자체, 사이의 어떤 것으로 말하고 있는 것이다. 이는 의도와 목적이 다를 수도 있고 다른 어떤 차이가 있을 수도 있다. 어쨌든 중요한 것은 그 지점이 있다는 사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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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자와 나비의 꿈에서 물화를 이야기할 때는 심지어 장자가 구분과 차이 자체를 인정하는 것처럼 보인다. 장자와 나비 사이에 무슨 차이는 있을 것이라고 말한다. 즉, 원형이라는 전체성 반액체 상태의 형태를 구분, 개념화, 언어, 객체화라는 실로 묶어버려 전체성과 상호연개가 사라진 상태에 대한 부정일 뿐이지 나비라는 무언가의 상태, 나라는 무언가의 상태 자체의 차이를 부정하는 것은 아니다 다만 전체성의 시각에서 나와 나비는 개체를 구분함으로서의 나와 나비를 보는 시각과는 다를 것이다. 이런 전체, 상호성, 변화에 열려있는 시각이 장자의 사물을 보는 시각인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