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 장자, 내편 - 응제왕 <5> 장자의 손 끝 너머로 : 이정

    분기점을 꽂아두고 출발한 끝없는 항해, 또 다시 갈림길에 서있다. 첫 시작을 더듬어 보니 옴짝달싹 못하게 묶여버린 인간의 비참한 삶, 그리고 다람쥐 쳇바퀴 돌듯 끝나지 않는 참연속의 굴레와 투명한 벽에 둘러쌓인 무력한 나의 존재. 나는 진흙탕을 피하려 이리저리 치우쳐가며 발을 놀렸고 길속에서 진흙탕을 잘 피해가는 때도 진흙탕을 피하려다 구덩이에 빠지게되는 때도 있었다. 그리고는 어느순간 지쳐버렸다. 피하기도 다시 일어나기도, 삶으로 말미암아 세상의 온갖것으로부터 파생되는 분노를 더 이상 피해갈 수 없었다. 그 뒤로는 망각의 길로 들어섰다. 다만 망각은 그 순간이었고, 양날의 칼처럼 끝없이 행복했던 나의 극과 극의 것들을 모두 가져가 무의 형태로 만들어버린것이다. 억울했다. 결코 불행할수도, 행복할수도 없었던 망각의 굴레에서, 분노는 천천히 나를 뒤덮는 우중충한 대기를 만들어냈다.


    딱 그 중간, 불편하지도 편하지도 않은 애매한 지점에서 분노는 다시금 버얼건 화를 사방팔방으로 뻗쳐나갔다. 그리고 처음으로 타인의 고통속에서 ‘나’를 마주하며 분노를 삼킨 채 입을 닫아버렸다. 회한의 한숨을 내쉴적마다 고운 나의 폐는 시들어갔지만, 분노는 천천히 심연 속 그 어딘가에 결정을 만들어냈고 나는 그 결정을 발판삼아 새로운 도약을 할 수 있었다. 그것은 모순이었다. 내가 넘어야할 산이 무수한 담금질 끝에 만들어진 결정체 없이는 쉽사리 넘어설 수 없는 벽이었다는 사실이. 발판을 딛고 처음으로 마주한곳은 경계없이 제멋대로 생겨먹은 또 다른 세상이었다. 
그렇게 지평선 너머의 세상에서 철저히 고독하고 외로운 시간을 가졌고 동시에 길가에 누워 꽃과 함께 쉬어갈 수 있었다. 또한 존재의 근원속에서 불안앞에 홀로 절망을 맞닥뜨리며 인간의 지혜로는 헤아릴수 없는 커다란 필연을 느꼈다.  하지만 그 길에 서있음에도 불구하고 때로는 나의 도약에 대한 의구심을 지울 수 없었다. 혹시 순수한 열망이 아닌 내가 쉽사리 꿰찰 수 없는것들로부터 도망가는것인지 혹은 타자로부터 비롯된 분노의 영향이었는지 혼란스러웠다. 나는 어렸고 흩뿌려진 장막을 걷어낼만한 실증적인 경험이 없었다. 

    결국 다시 아스팔트의 길을 찾을 수밖에 없었다. 잘 닦여진 길, 신호대로만 따라가면 모두가 행복해질 수 있다 믿어지는 길, 함께할 수 있는길. 그 길을 걷는듯 걷지 않는듯 두 눈을 치켜뜬 채 갖게된 확인의 시간. 확인을 거듭할수록 확신에 차게되었지만 그 이면에는 또 다른 불안이 스몰스몰 올라오고있었다. 지금의 때를 놓치게 된다면 다시는 그들과 함께할 수 없을것같은 막연한 느낌과 다시 돌아온 길에는 꽉꽉막힌 고속도로에서 지루한 시간을 보내게 될것만 같은 실체없는 불안. 끈적한 아스팔트의 늪에서 천천히 침전되어가는 상태였던 것이다. 그렇게 내 안과 밖에서 답을 구하는 시기에 나는 장자를 만났다. 아스팔트와 들판의 사이를 횡단하는 길은 없는가? 묻는 내게, 장자는 곧장 들판의 길로 나아가야함을 일러주었다. 때로 아스팔트 길가에 핀 꽃들은 들꽃보다도 더 나의 마음을 감동하게 하지만, 기난긴 가뭄속 단비에 지나지 않았고 내가 실제로 꽃에 대해 알고 싶다면 수많은 꽃들이 피어있는, 세찬 비가 몰아치는 들판으로 나아가야함이 마땅했던 것이었다. 실제로 돌아보니 분기점을 꽂아두고 출발한 끝없는 항해에서 보이지 않는 암초를 피하기에 급급했고 배의 동력이었던 분노의 결정은 천천히 소멸되어 마지막 빛을 발하며 끝내 망망대해에서 나아가기를 멈춰버렸던 것이다. 이제는 나아갈 동력도 나아갈 곳도 없는 그저 혼란속에 있던 내게 장자가 건네준 것은 순수로의 회귀였다.

    천지 본연의 모습을 따르고 자연의 변화에 순응하여 무한의 세계에 노니는 자, 내속 자연의 소리에 귀를 귀울여 자연의 이정표를 따라 흘러가는 일. 삶과 죽음속에서 직면하는 행복과 불행, 즐거움과 괴로움 기쁨과 슬픔마져 空이 된 마음으로 흘려보내는일. 만물이 하나임을 깨닫고 궁극적인 하나의 세계로 돌아가는, 세상 어디에도 의존할 것 없는 자유로의 형태. 이 세상 태초의 것. 생명의 본질. 그저 발길닿는대로, 마음을 돛풍삼아 바람부는대로 흘러가, 내 마음이 이끄는 그곳으로 가는것이 자연스러운 행보였던것이다. 나는 장자와의 만남또한 자연이 부르는 필연의 소리가 아닐까 생각한다. 우리의 만남도 이곳 봄에 그저 흘러흘러 왔던것도 장자를 만나 다시 장자의 손끝너머로 흘러가는 일까지. 바로 이것이 장자가 말하는 道가 아닐까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