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 감시와 처벌 <1> 수형자의 신체 : 김지원

1. 형벌의 변화 ㅡ권력 작용 방식의 변화

*(...)드디어 그는 네 갈래로 찢겨졌다. 이 마지막 작업은 시간이 많이 걸렸다. 왜냐하면, 동원된 말이 그러한 견인 작업헤 익숙해 있지 못했기 때문이다(24).

    다미엥의 화려한 신체형이 보여주듯, 18세기 이전의 형벌은 '고통의 요란스러운 과시'를 중요하게 생각했던 듯 하다. 만인이 보는 앞에서 팔 다리를 찢고, 내장이 튀어 나오고, 비명을 지르는 범죄자의 모습은 사람들에게 어떤 형상을 만들어낸다. 그러한 형상은 다름 아닌 왕권이라 할 수 있다. 이런 의미에서 18세기 이전의 형벌은 범죄자 1인에게만 행사하는 권력이 아닌, 이를 보고있는 만인에 대한 직접적인 권력의 행사라고 할 수 있다(그러한 권력의 운영 방식이라고 할 수 있다). 

*단두대야말로 고통을 느낄 수 있는 실제의 신체에 대한 법의 적용이라기보다 모든 권리 중에서도 특히 생존권의 보유자인 법적 주체에 대한 법의 적용이라고 간주된다. 그것은 법 그 자체의 추상화된 의미를 확보하는 것이었다(38).

    19세기 초, 혁명과 변혁의 시기를 거치며 공중의 구경거리로서의 신체형은 서서히 소멸한다. 고통의 요란스러운 과시를 제거하고, 한층 더 교묘하고 부드러운 방법으로 고통을 전환시킨 것이다. 단두대 등의 고통이 없는 사형이 집행되는데, 이는 고통스러워 하는 인간 모습의 삭제이긴 하지만, 여전히 대중의 시선을 배제하지는 않는다. 이러한 변화가 의미하는 것은 무엇일까? 왕권의 '톱니바퀴'로서의 형벌이 힘을 잃고, 법의 표상으로서의 형벌로 권력이 이동했음을 말한다. 법의 집행이 권력의 톱니바퀴를 굴러가게 하는 방식이 된 것이다.

*그러나 동시에 사람들은 정념, 본능, 비정상, 불구, 부적응, 환경 혹은 유전의 영향을 재판하는 것이다. 사람이란 공격적 행위에 대해 재판하지만, 그것을 통해 공격적 성향을 재판하는 것이다(45). 

    19세기 이후, 이러한 법이 가진 권력의 톱니바퀴로서의 형벌은 더욱 복잡한 형식으로 변화한다. 더 이상 신체에 대한 형벌이 아닌, 정신에 대한 형벌로, 나아가서는 정신을 포함하고 있는 신체에 대한 형벌로 변화하는 것이다. 법은 심판을 위한 도구의 역할에서 '인간이 되게 하는'역할로 바뀌었고, 범죄의 진실을 요구하는 것에서 범죄자 내부의 문제를 분석하고, 치료하는 것으로 옮겨왔다. 또한 재판관과 사형 집행인이 동일시 되던 인식이 점차적으로 변화하는 과정에서 재판관 이외의 정신과 의사, 심리학자, 교육자 등이 처벌권을 분할 행사하게 되었다. 형벌의 방식이 권력의 작용 방식을 설명한다면, 19세기 이후 형벌은 어떠한 권력의 표상을 내포하고 있는 것일까? 법의 역할이 범죄의 진실 요구에서 범죄자 내부의 문제로 전환되는 지점에서 그 답을 찾을 수 있다. 권력은 더 미시적인, 각 개인과 그 개인의 관계로 옮겨 온 것이다. 

*범죄 사법이 운용되고 자신의 권력을 정당화 하는 방식은 이처럼 사법 이외의 지식에 의존해 이루어졌다. 징벌의 완화는 권력의 완화가 아니며, 징벌의 적용 지점이 달라진 것일 뿐이다. 과학적인 담론들은 처벌을 관장하는 권력의 실제와 함께 형성되고 교착되어 있다.

2. 권력의 성질 ㅡ신체의 규율화

    권력은 더이상 어떤 주체를 설정할 수 없게 되었다. 왕으로 대표되던 권력의 상징은 이미 몰락했고, 법도 법 그 자체로서 가지는 권력이 희미해졌다. 재판을 하는 이는 판사가 아닌 모두가 되었고, 그 의미는 법이라는 추상적(다가오지 않는) 개념에 앞서 각 개인에게 내면화 되어지는 현실적인 규율이 우선시 되었다는 것이다. 

*권력의 미시 물리학을 분석하는 작업은 그 전제로서 우리들이ㅡ권력에 대해서는ㅡ폭력과 관념의 대립, 소유권에 대한 비유적 표현, 계약이나 정복의 모형을 버려야 하고, 한편 지식에 대해서는 '이해관계가 있는' 것과 '이해관계가 없는' 것과의 대립, 인식의 모형과 주체의 우월성을 버려야 한다는 것이다(59)

    계속해서, 처벌 방식의 변화는 권력의 성질을 설명한다. 권력은 주체자가 행사하는 폭력도, 소유도, 계약이나 정복의 모형도 아니다. 이는 단지 작동방식일 뿐, 그 방식이 권력의 성질을 규정하지 않는다. 오히려 권력 그자체는 순수한 힘이라고 할 수 있다. 주체 또한 힘을 가진 사람만을 이야기 하는 것이 아니며, 힘을 행사하는 사람과, 그에 의해 영향을 받는 사람을 포함한다. 권력은 말하자면 관계 그 자체인 것이다. 관계가 작동방식을 만들며, 만들어진 작동방식에 의해 권력은 작동하고, 작동하는 권력에 의해 사람들은 살아가며, 변화하고, 변화는 또 새로운 작동방식을 요구하게 되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주체는 우리가 너무나 당연스레 받아들이고 있는 데카르트적 주체가 아닌, '주체화'라는 방식으로 표현될 수 있다. 그래서 중요한 것이 바로 근대 이후의 스스로 주체화 하는 '신체'이다. 기존의 서구 철학의 기본적인, 전제적 사유 방식인 데카르트적 주체는 이성, 정신의 완성을 중시하지만 푸코는 이를 뒤집는다. 

*그것은(정신은) 권력이 신체에 대해 행사하는 지배력 안의 한 부품인 것이다. 영혼은 정치적 해부술의 성과이자 도구이며, 또한 신체의 감옥이다(62)

*소유된다기 보다 행사되고, 획득하거나 보존하는 특권이 아닌 총체적 효과로서의 권력. 이 권력은 특정 지식을 창출하고, 이 지식과 긴밀히 연관하여 인간의 신체를 복종하는 신체로 만든다. 신체는 생산하는 신체인 동시에 복종하는 신체일 경우에만 유익하게 작동하기 때문이다. 권력이 가장 직접적으로 작동하는 수형자의 몸, 즉 처벌의 대상이 시네에서 정신으로 옮겨온 것에 의거할 때, 정신 또한 위와 같은 맥락으로 권력 아래 놓여있는 것이다.

    정신이 신체를 지배하는 방식이 아닌, 신체의 규율이 정신을 규제하고 있으며, 이것이 다시 신체의 자발적 규율로 나타나는 방식인 것이다. 이런 방식으로 인간은 사회적 규율을 내면화하고, 스스로를 정상의 범위에 포함시키려 한다. 이러한 의미에서 '주체'는 없고, '주체화'하는 신체만이 있을 뿐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그 신체는 끊임없이 이어지는 관계 속에서 실제하며, 그 말은 즉 권력 속에서만 실제한다는 뜻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