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 장자, 내편 - 응제왕 <1> 장자는 현실이다 : 김범석

    이상과 현실을 구분하는 이분법의 세계에 갇혀있다면, 결코 자유롭지도 못할뿐더러, ‘장자의 현실’을 받아들일 수도 없다. ‘장자의 현실’은 우리가 계산적으로, 분석적으로 따져서 구체적인 데이터로 얻어내는 확률적인 것이 단연코 아니다. 장자는 우리의 의도와 달리, 분석, 데이터, 확률의 뿌리가 되는 ‘인간 세계의 현실’을 깨부순다. 그리고 그 위에 다시금 ‘장자의 현실’을 세운다. 그렇기 때문에, 장자를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은 장자를 두고 이상적인 사람이고, 단지 낭만적인 사람이라고 일컬을 것이다. 그러나 장자를 이해한다면, 장자가 얼마나 현실적인지 알 수 있다. 장자만큼 현실에 가까운 사람이 또 있을까 싶다. 

    그렇다면 먼저, 이상과 현실을 구분하는 이분법의 세계에 대하여 비웃는 것으로 시작해보자.

‘응제왕’ 편에서, 양자거가 물었다. “부디 훌륭한 왕의 정치에 대해 들려주십시오.” 노담이 대답했다. “훌륭한 왕의 정치란 그 공적이 온 세상에 미치면서도 자기 때문이 아닌 것처럼 하고, 만물에 교화(敎化)를 베풀지만 백성은 [별로 그것을 깨닫지 못하고] 의지하지 않는다. 선정(善政)이란, 베풀어지고 있으나 뭐라고 나타낼 수 없으며, 만물을 각기 만족하게 하고 있다. [그리고 그러한 왕은] 짐작도 할 수 없는 경지에 서서, [속박이 없는] 무(無)의 세계에 노니는 자이다.”

    한 사람은 분명히 훌륭한 정치를 알려달라고 했다. 그리고 한 사람은 분명히 ‘무(無)’라고 말했다. 철저히 ‘속세의 현실’ 입장에서, 장자의 말은 웬 뜬구름 잡는 소리만도 못하다. 정치를 잘 하는 게 무엇이냐는 무엇보다 현실적인 질문에 대하여, 무(無)라고 하면서 ‘그런 것 없다’, 혹은 ‘그러지 마라’라고 하는 것도 아니고, 심지어 무(無)야말로 훌륭한 정치라고 하는 것이다. 물론 여기서의 무(無)는 아무것도 없고 허무한 염세주의적 무(無)라기 보다는, 인위로부터 벗어나, 사람들의 욕구들이 자연스럽게 움직이는 차원에서의 무(無)일 것이다. 그리고 이렇게 무(無)를 ‘자연’적인 것으로 바라본다면, 장자의 무(無)를 통한 정치도, 전혀 이상적이지 않고 오히려 현실적이다. 우리는 이미 수많은 정치적 책략들이 난무하는 시대에 대하여, 어떠한 것이 합리적인 정치냐고 묻는 상황이었다. 유가는 인의를 말하고, 법가는 법치와 패권을 말했다. 이러한 상황에 대하여 갑자기 무(無)라는 화두를 던진 것이다. 그리고 이 화두를 보는 순간, 우리의 현실과 이상에 갇힌 이분법적 사고방식은 순간 깨부수어진다. 그동안 현실과 이상이라고 바라보았던 분석적, 확률적 개념들과 유가와 법가의 책략들이 자연을 가로막고, 인위적인 규범을 통해 인간 본성을 조작하는 것이 된다. 오히려 제자백가의 학설들이 인간의 ‘자연 상태’보다 더 허구적인 이데올로기를 양산한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이데올로기에 갇힌 인간들은, 자신의 이데올로기가 더 현실적이라고 우기며, 장자의 말을 이상적이라고 치부한 것이다. 그런데 장자의 무(無)를 이해한다면, 어느 쪽이 더욱 현실적인 것인지 우리는 알 수 있다. 살아 숨 쉬는 자연이, 공상으로 만들어진 이데올로기보다 현실적인 것 아니겠는가. 이렇듯, 장자의 무(無)는 참된 ‘현실’을 자각하도록 해준다.

    ‘응제왕’에서 정치를 비웃으며, ‘장자의 현실’로 고개를 돌렸다면, 이제 조금 더 구체적으로 ‘장자의 현실’에 접근해보자. ‘인간세’의 ‘무용지용(無用之用)’ 개념을 통해서 ‘장자의 현실’이 더욱 명확해질 것이다.

‘장석’이라는 나무꾼은 마을의 토지신을 모시는 ‘상수리나무’를 거들떠보지도 않으며 “쓸모없는 나무야. 배를 만들면 가라앉고, 널을 짜면 곧 썩으며, …, 기둥을 만들면 좀이 생긴다.”라고 한다. 이후 ‘상수리나무’는 ‘장석’에게 이런 말들을 한다. “아가위, 배, 귤, 유자 따위 열매 종류는 그 열매가 익으면 잡아 뜯기고, 뜯기면 [가지가] 부러진다. …이는 그 [초목이 맛있는 열매를 맺는] 능력 때문에 제 삶이 괴롭혀지는 셈이다. 그래서 그 천명(天命)을 다하지 못하고 도중에 죽게 된다.” “가령 내가 쓸모가 있었다면 어찌 이토록 커질 수 있었겠는가. [그리고] 너도 나도 다 같은 하찮은 것(物)이다. 어찌 서로를 하찮다고 헐뜯겠는가. [너같이] 거의 죽은 [거나 다름없는] 쓸모없는 인간이 어찌 산목(散木)을 알겠는가.”

    여기서 장자는 인간 ‘속세의 현실’ 개념을 비웃다 못해, 감사히 여긴다. 그리고 속세의 이데올로기와 이상과 현실의 이분법에 갇힌 인간은 역시 장자의 무용지용(無用之用)을 의아해 하며, 한낱 낭만적인 ‘이상’으로 치부할 것이다. 그러나 어쩌면 여기서 나타난 장자의 무용지용(無用之用)은 가장 ‘현실’적이다. 애꿎은 ‘이데올로기의 현실’과 그 속에 나타난 쓸모 있음은 분석적이고 분절적인 인간만을 위한 쓸모 있음이다. 그런데 이 쓸모 있음이란 단지 인간 욕망에 의한 것으로 객관적이기 보다는 다분히 주관적이다. 그렇게 ‘만들어진 현실’은 ‘장자의 현실’과 대비되며 존재한다. 나무꾼 장석의 쓸모 있음 역시 그 나무를 인간 세계에서 어떻게 잘 사용할 수 있는가에 초점이 맞춰져 있다. 그러나 ‘장자의 현실’에서는 인간의 인위로 하여금 쓸모 있게 되는 것이 오히려 악을 낳는 것이 된다. 그래서 차라리 무용지용(無用之用), 즉, 인간 세상에서 쓸모없게 되는 것이, 자신의 천수를 누릴 수 있게 된다는 의미에서 ‘용(用)’, 쓸모 있는 것이 된다.

    그런데 이러한 상대적인 의미에서만 쓸모 있음이 발생하는 건 아니다. 자세히 보면, 장자는 ‘정말로 쓸모 있는 것이 무엇이냐?’라는 질문을 던져주는 것이다. ‘응제왕’에서 ‘무(無)’를 통해 진정한 정치가 무엇인지 말했다면, ‘인간세’에서는 ‘무용지용(無用之用)’의 신선한 반전을 통해 또 다시 진정한 쓸모 있음이 무엇이냐고 되묻는 것이다. 이를 통해 ‘장자의 현실’과 우리가 습관적으로, 관습적으로 받아들인, 사회에서 말하는 단순한 현실과 이상은 명백히 다르게 된다. ‘장자의 현실’은 이데올로기에 고착된 기존 사회의 인습으로부터 삶을 관조하면서, 진정한 ‘현실’은 어떠한 것이어야 하는지 반문하고 있다. 그리고 장자는 반(反)인습적인 의미에서 ‘무(無)’와 ‘무용지용(無用之用)’을 말하지만, 나는 장자가 단지 상대적인 해결만을 말하는 게 아니라, 그 이면에 내재되어있는 ‘자연’이라는 것을 말한다고 생각한다. ‘자연스러운 정치’와 ‘자연스러운 쓰임’을 말하려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럼 이제 우리는 ‘장자의 현실’을 구체화하는 과정에서 ‘자연스러움’에 대해 살펴보아야 한다. 그래서 나는 장자 외편의 ‘마제’와 장자 내편의 ‘양생주’에 나타난 ‘자연스러움’과 ‘장자의 현실’에 대해 말하고 싶다. ‘마제(馬蹄)’편엔 이런 구절들이 나온다.

“말은 발굽이 있어 서리나 눈을 밟을 수 있고, 털이 있어 바람이나 추위를 막을 수 있다. 마음대로 풀을 뜯고 물을 마시며 깡충거리고 뛰논다. 이것이 말의 본성이다. 높은 건물과 화려한 궁전이 있대도 말에게는 소용이 없다.” “말이란 흔히 풀을 뜯고 물을 마시며, 기쁘면 서로 목을 맞붙인 채 비벼대고, 성나면 서로 등을 돌려댄 채 발길질을 한다.”

    이 얼마나 생동감 넘치는 장자의 비유일까. 말(馬)의 본성은 그렇다. 자연 속에서 뛰놀고, 풀 뜯고, 물마시면 그뿐, 대궐같이 큰 집도, 채찍도 다 소용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간은 말을 자신들의 쓸모 있음으로 바라보며 사용한다. 그러나 분명히 말의 본성과 자연스러움은 변하지 않고 존재한다. 이러한 의미에서 ‘자연’이 존재하는 것이고, ‘장자의 현실’이 드러나는 것이다. 마치 말이 뛰어 놀 듯이, ‘장자의 현실’은 생동감 넘치고, 평화스러운, 역동하는 힘들로 이루어진 것이다. 이런 ‘자연’ 개념을 묘사한 것은 ‘양생주’에도 등장한다.

“못가의 꿩은 열 걸음 걸어서 [겨우] 한 입 쪼아 먹고, 백 걸음 걸어서 한 모금 마시지만, 새장(鳥籠)속에서 길러지기를 바라지 않는다. [새장 속에서는 먹이가 충분하여] 기력은 왕성하겠지만 속이 편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여기서는 ‘새’에 따르는 ‘자연스러움’을 묘사한다. 열 걸음, 백 걸음을 걸으며 먹을 것을 스스로 먹고, 물을 스스로 마셨으면 마셨지, 막힌 곳에 갇혀서 지내는 것은 새의 본성에 맞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는 결국 새의 ‘자연스러운’ 본성을 말하려는 것이다. 동시에 ‘장자의 현실’이 지극히 있는 그대로의 사물의 원형과 자유를 추구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끝으로, 장자의 ‘양생주’편에 나타난 소 잡는 ‘포정’ 이야기와 ‘소요유’편에 나타난 ‘진인(眞人)’과 ‘허유’ 이야기를 통해, ‘장자의 현실’ 속에 나타난 ‘자연’을 따르는 존재들을 느낄 수 있다. 예술적으로 소를 잡는 ‘포정’을 보며, 문혜군은 그 기술을 묻지만, ‘포정’은 ‘도’를 말한다.

“제가 반기는 것은 도입니다. 처음 소를 잡을 때는 눈에 보이는 것이란 모두 소뿐이었으나, 3년이 지나자 이미 소의 온 모습은 눈에 안 띄게 되었습니다. 요즘 저는 정신으로 소를 대하고 있고 눈으로 보지는 않습죠. 눈의 작용이 멎으니 정신의 자연스런 작용만 남습니다. 천리(天理)를 따라 …”

    아무리 다시 읽어도 이 경지에 이른 포정의 몸놀림을 상상하자면, 한 명의 행위예술가만이 떠오를 뿐이다. ‘장자의 현실’에서 가장 현실적인 인물은 어쩌면 한 사람의 행위예술가가 아니었을까? 포정이 ‘천리’와 ‘도’를 따라 고기를 다루듯, 인간이 자신의 ‘자연스러운’ 움직임에 따라서 행위를 하고, 그 행위를 행함과 동시에 행위를 하는 감각 작용을 잊는 단계를 말하는 것 아닐까. 그렇게 우리는 다시 한 번, ‘현실’적인 것에 대해 떠올려야만 한다. 과연 내가 지닌 본성과 그에 따라 자유롭게 움직일 수 있는 것들의 가능성에 대해서는 생각해 본적이 있던가. 그보다는 인습에 찌들어, 내 자신의 ‘자연스러움’을 소홀히 하지는 않았던가. 이러한 의미에서 이데올로기에 젖은 사회 속의 현실은 철저히 환상이 되는 것 아닐까. 그리고 동시에 ‘자연스럽게’ 움직이는 ‘장자의 현실’속에 사람들이 오히려 ‘참된 것’에 가까운 것은 아닐는지.

    한편, ‘소요유’엔 ‘요 임금’이 ‘허유’에게 천하를 넘겨주려고 하는데, 이에 대해 ‘허유’가 말하길 “뱁새가 깊은 숲 속에 둥지를 짓는다 해도 불과 나뭇가지 하나면 족하고, 두더지가 강물을 마신다 해도 그 작은 배를 채우는 데 불과하오. … 자, 그대는 돌아가 쉬시오. 내게는 천하란 아무 소용도 없소.” 이렇게 허유는 천하를 준다던 요임금이 자신을 괴롭힌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자기 분수에 알맞은 삶을 택한다. 사회적인 현실을 떠나서 ‘장자의 현실’로 이 이야기를 보면, 사실 하등의 이상한 점이 없다. 어쩌면 이 이야기를 보며, 허유가 이상하다고 여기는 사람이야말로 자신의 생각이 진정한 자신의 생각이어야만 했는가를 한 번 의심해볼 필요가 있는 것이다. 이렇게 생동적인 필치로 장자가 ‘자연스러움’과 ‘장자의 현실’을 묘사했건만, 이를 알아주지 못하고, 아직도 눈앞의 현실에만 급급하다면, 참으로 불행하다고도 할 수 있다. 

    그래서 ‘장자는 현실이다.’ 라고 했다. 이미 ‘장자의 현실’은 현실 그 자체이건만, 내가 유난을 떨며, 장자만이 진정한 현실이라고 과장한 것인가? 그렇다면 나 역시 아직 속세에서 칭하는 ‘속세의 현실’에 사로잡혀서, ‘장자의 현실’을 대단하게 취급한 것이 되니, 나 또한 아직 ‘속세의 현실’을 잊지 못한 것이 된다. 뭐 그러나 언젠간 이러한 분별을 뼛속 깊이 떠나게 될 것을 기대하면서, 다시금 ‘장자의 현실’을 떠올려본다. 그렇게 ‘무(無)’와 ‘무용지용(無用之用)’을 통해 정치와 쓸모 있음, ‘속세의 현실’이 재평가 되어야 함을 느낀다. 그리고 그보다 중요한 것으로 사물 자체의 본성이 무엇인지 따져보아야 할 필요성을 느낀다. 말이 들판을 뛰어 놀 듯이, 새가 새장에 갇히지 않듯이, 포정이 고기를 썰 듯이, 허유가 산속에 기거하듯이 말이다. 그들과 같이 ‘자연스러움’을 따라 분수에 맞는 행위를 하는 것이 자기의 본성을 따르는 것 아니겠는가. 그리고 이것이 바로 ‘장자의 현실’이 아니겠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