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 장자, 내편 - 응제왕 <2> 김지원

1. 쓸모없음의 쓸모

키가 크고 곧게 뻗은 소나무가 말했습니다. “나는 이번에 새로 짓는 임금님의 별장 마룻대가 되어 임금님이 쉬러 오면 쉽게 볼 수도 만질 수도 없는 그 모습을 지켜볼 거야” 소나무는 다음 날, 목수가 베어가 개집이 되었습니다.

    사실, 내가 군대를 전역하며 가지고 나온 많은 꿈들은, 그동안 군대 안에 갇혀 있어서 누리지 못했던 관계에 대한 욕망, 표현에 대한 욕망, 관심 받고 싶다는 욕망, 사랑 받고 싶다는 욕망들이었다. 모든 행위는 그러한 범주 안에 있었고, 그런 욕구의 해결이 나에게 가장 시급한 문제이며 또한 절실한 문제였다. 그랬기 때문에 더욱이 이것저것 많은 일들을 벌였다. 무엇이 나의 욕구를 채워줄 수 있을지 스스로 너무나 잘 알았다. 1년 9개월 동안의 끊임없는 이미지 트레이닝 덕에. 연암 강좌, 의역학 강좌, 악어떼 프로젝트, 쪼끄만 공연, 철학 세미나, 돈의 맛 프로젝트, 통기타 레슨, 등. 손에 쥐어지는 대로 물고 빨아대는 1살짜리 아기처럼 물고 빨아댔다. 처음엔 그저 그런 정도의 수준이었다. 시간이 지나고, 나에게 다가오는 현실들이 뜬 구름 같은 꿈이 아니라 내 일상이 되고, 그 일상에 집중하게 되면서 단순한 욕구의 해결이던 행위들에서 천천히 많은 것들을 받아들일 수 있게 되었다. 내가 배우고 느끼는 것들은 나에게 변화를 가져다주었고, 그러한 변화들은 자연스럽게 내 욕구에 변형을 일으켰다. 조금 더 큰 그림, 내 삶을 조금 더 풍성하게 만드는 것. 

    다시 한 번 정리해 보자면, 장자가 이야기하는 ‘쓸모없음’이란 우리가 쉽게 ‘쓸모 있는 것’이라고 느끼는 것들이다. ‘우리’라는 것은 대부분의 사람들을 이야기한다. 그들이 공유하고 있는 가치. 어떤 물건은 어디에 쓰여야 하고, 어떤 사람은 어떻게 살아야하고. 결국 장자는 그러한 가치판단에서 한 발 물러나 다시 생각해 보자고 제안한다. ‘쓸모’라는 것은 도대체 누가 정하는가? 우리의 정제되지 않은 욕구는 사회적 흐름에 자연스럽게 합류한다. 아무런 생각이 없는 상태일수록 더욱이 그렇다. 당연하다고 믿고 있었던 가치에서 벗어나는 그곳에서 변혁이 일어나고, 변혁이 변화를 가지고 온다. 그리고 변화가 바로 ‘자연의 이치’이다.

2. 양생

토끼가 사자로부터 열심히 도망치는 모습을 본 저는 토끼가 불쌍한 생각이 들었습니다. 이어서 사자에게 잡아먹히는 토끼를 본 저는 순간 분노를 감추지 못하였습니다. 그래서 손에 쥐고 있던 활을 당겨 사자를 죽였습니다.

자연에는 판단이 없다. 우리는 사자에게 쫓기는 토끼를 보면, 그를 구해주고 싶은 마음이 든다. 마침내 사자의 이빨이 토끼의 머리를 물어뜯고, 토끼의 내장이 바닥에 나뒹굴면 어떨까? 우리는 토끼와 하나 되어 분노할 것이다. 
그렇다면 사자는? 사자는 원래 잔인한 동물이라서 토끼를 찢어버린 걸까? 토끼를 찢어 죽이는 사자는 나쁜 사자고, 풀을 뜯어 먹어야지 착한 사자인 걸까? 토끼가 살기 위해 뛰는 것처럼, 사자도 살기 위해 뛰었다. 둘이 살기 위해서 뛰었다는 사실은 같은데 왜 우리는 그 같은 감정을 느끼는 건가? 그래서 우리는 사자를 죽였다. 우리는 살기 위해서 사자를 죽였나?
그저 자연은 그 자체로 자연이다. 좋고 나쁨 같은 것은 없다. 살기 위함이 있을 뿐이다. 결국 ‘스스로를 살게 하는 것’ 그것이 자연인 것이다. 나아가 건강한 삶이란 그러한 개인들의 관계로서 만들어지는 것이 아닐까 생각해본다. 배고프지 않은 사자는 토끼를 봐도 찢어버리지 않는다. 사자가 없다면 토끼들은 살이 뒤룩뒤룩 찔지도 모른다. 그런 것이 양생이 아닐까.

3. 도道

미친자 접여가 공자에게 물었습니다. “도는 도대체 어디에 있습니까?” / 공자가 말했습니다. “너의 머리카락에도 있고, 아침 밥상에도 있고, 투전판에도 있고, 길바닥에 앉은 거지에게도 있다. 몸 파는 여자의 음부에도 있고, 고승의 손바닥에도 있다” / 접여가 물었습니다. “도를 만질 수 있습니까?” / 공자가 말했습니다. “만질 수도 있고, 볼 수도 있고, 만질 수 없기도 하고, 보이지 않기도 하다” / 접여가 물었습니다. “그렇다면 도는 믿음입니까?” / 공자가 답했습니다. “믿음이기도 하고, 실재이기도 하다” / 접여가 물었습니다. “실재하는 도를 보여 주십시오” / 공자가 답했습니다. “내가 너에게 보여줄 수는 없지만, 네가 스스로 볼 수는 있다” / 접여가 다시 물었습니다. “어떻게 보아야합니까” / 공자가 말했습니다. “어찌 도를 보는 것에 집착하려 하느냐. 너는 너의 어머니의 사랑을 보아야 아는가? 소리가 보이지 않는다고 들리지 않는 것이냐? 바람도 보이지 않고, 몸에 달라 붙은 이도 보일 때가 있고 보이지 않을 때가 있는데 보일 때는 있는 것이고, 보이지 않을 때는 없는 것이냐” / 접여가 물었습니다. “어머니의 사랑은 행위로서 표현됩니다. 어머니가 아침마다 밥상을 차려주지 않으면 저는 어머니의 사랑을 못 느낄지 모릅니다. 바람과 소리는 보이지 않지만 느껴지고, 들리지 않습니까? 몸에 붙어사는 이도 때론 보이지 않지만 이미 그것을 보았기에 있다고 하는 것이 아닙니까” / 공자가 말했습니다. “맞다. 도 또한 느끼는 것이다. 네가 보지 않았다고 없는 것이 아니듯, 네가 느끼지 못한다고 없는 것이 아니다. 또한 내가 보여줄 수 없지만 네 스스로 볼 수 있다고 했던 것도 내가 느끼는 도와 네가 느끼는 도는 같은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누구에게나 같은 도는 없기 때문에 누구나 같은 방식으로 도를 얻을 수 없는 것과 같은 이치다. 하지만 또 그것은 같은 것이기도 하다” / 접여가 물었습니다. “그렇다면 도를 행하는 자는 어떤 자입니까” / 공자가 답했습니다. “도를 얻은 자는 도를 모르는 자이다” / 접여가 마지막으로 물었습니다. “도를 얻은 자는 어떤 옷을 입습니까” / 공자가 마지막으로 답했습니다. “네가 도를 얻으면 나한테 알려줘라”

    이상의 모든 것이 도이다. 도는 길이다. 길은 목표가 아니다. 어떤 과정을 담고 있을 뿐이다. 도를 산에 들어가 수양함으로서 얻어지는 완성의 단계로서 인식하면 안 된다. 그것은 도를 하나의 목표로 삼는 것이다. 도는 일상에서의 세밀한 사건들, 현장들을 놓치지 않고 마주하는 곳에서부터 시작 되는 것이다. 당연한 아침밥상을 당연하지 않게 보는 것. 그것은 곧 끊임없는 성찰의 과정이다. ‘도를 얻은 자는 어떠해야한다’라는 것은 결국 도를 얻지 않은 사람들이 그것을 인식하기 위한 정의일 뿐, 그것은 아무런 소용이 없다. 장자는 도에 대해 ‘잊음’을 강조한다. 이는 첫 번째로 세속의 가치에 대한 잊음이다. 쓸모없음의 쓸모에서 이야기하는 바로 그 쓸모없음을 잊는 것. 쓸모없음을 잊는 것은 그 자체로 하나의 변혁이고, 쓸모이다. 그리고 두 번째로 자신이 잊었다는 사실을 잊는 것, 도를 도라고 인식하지 않는 것이다. 그런 때에, 우리는 매번 새로운 삶을 온전히 만날 수 있게 된다. 나는 결국 도를, 끊임없는 공부라 이야기 하고 싶다. 그리고 그것이 결코 일상과 다르지 않음을 덧붙이고 싶다. 큰 숙제가 던져졌다.

20년 후, 공자가 접여에게 찾아가 물었습니다. “선생님, 도를 얻은 자는 어떤 옷을 입습니까” / 접여가 답했습니다. “나는 도를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