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 홍세화 특강 <1> 의식, 교육, 그리고 정치 : 김범석

‘정상인이 되지 말자. 그 순간 죽은 거나 다름없다.’ ‘정상인에서 벗어날 때, 행복해질 수 있다. 정상인은 우울증에 걸리는 존재.’ 

    2008년 내 나이 18세, 고등학교 2학년에 썼던, 아직 가지고 있는 글과 메모다. 자극적이고도 충동적인 글이지만, 그때를 돌이켜보면 이런 글을 쓸 수밖에 없었다. 왜냐하면, 처음으로 나의 ‘의식’에 대해 생각했기 때문이다. 홍세화 선생님께서 이런 질문을 던지셨다. ‘내 생각은 어떻게 내 생각이 되었나?’ 이 질문이 처음으로 나에게 다가온 것은 18살, 적지 않은 나이였다. 적지 않은 나이인 만큼, 나는 충격에 빠졌다. 왜냐하면 내 17년간의 삶이 송두리째 사라졌기 때문이다. 정말 깜짝 놀랄 노릇이었다. 17년간 단 한 번도 내가 살고 있는 세계를 의심해본 적이 없었다. 그저 가정과 학교, 사회를 아무런 여과 없이, 내 의식 속으로 밀어 넣었다. 가정, 교육, 사회가 곧 나라고 생각했다.

    나는 혼란스러웠고, 분노했다. 지난 17년간 나는, 고등 교육을 마치고 ‘좋은 대학’을 나와 ‘좋은 직장’을 다니며 적어도 중산층의 기준에 속하는 말 잘 듣는 ‘착한 사람’이 ‘정상인’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어느 누구도, 특히나 심지어 ‘나’ 역시 이 사실에 동의한 적은 없었다. 따라서 그 혼란과 분노는 일차적으로, ‘정상인’을 꿈꾸는 사람, ‘정상인’이라는 개념 자체로 향했다. ‘정상인’을 향한 사회의 주입식 교육, 열망이 나를 눈 먼 장님으로 만들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저렇게 폭력적으로 글을 써대었다. 분노했고, 방황했기 때문에....... 그러나 아이러니하게도 지금은 누구보다 정상인처럼 살고 있다. 그러므로 나는 아직도 저 질문에 대해 끊임없이 묻고, 답해야 한다. ‘내 생각은 어떻게 내 생각이 되었나?’에 대해서 말이다. 이러한 맥락으로, 홍세화 선생님께서 한국인의 ‘의식구조’를 비판하시고, 의식구조를 형성하게 된 한국의 ‘교육 제도’에 대해 프랑스의 그것과 비교하신 뒤, 한국의 ‘정치’에 대해 정리하신 것은 나에게 너무나도 인상적으로 다가왔다. 인간의 근본부터, 그 근본의 형성, 그 근본의 발현을 순차적으로 정리하셨기 때문이다. 이래서 시대의 지식인이라는 건가.

    한국인, 데카르트의 ‘cogito ergo sum’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는 명언을 위반하는 대중. ‘생각하지 않고, 고로 존재하지 않는’ 한국인. 극단적인 비판이지만, 틀린 말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자기 자신이 먼저 ‘주체’가 되어서, 가정, 교육제도, 사회제도, 대중매체 등을 비판적으로 ‘생각’하고, 자신의 처지에 합당하게 생각을 형성하는 것이 권리를 지닌 인간의 의무라고 생각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국인은 대체로 자신의 가정, 교육제도, 사회제도, 대중매체를 비판적으로 바라보지 않는다. 그래서 자기 처지에 맞게 생각하는 사람은 매우 드물다. 그리고 이렇게 주체적, 비판적으로 생각하지 못하는 사람은, 습관처럼 스며든 사회적 흐름과 자신의 자아를 동일시하고, 비논리적인 정치관을 갖게 되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러한 의식을 형성하기에 앞서 문제가 되는 부분은 무엇인가? 바로 교육제도이다. 인간이 뱃속에서부터 그리고 정규 교육을 거치면서까지 자신의 의식을 형성하기 때문에 교육이 절대적으로 의식형성에 영향을 미칠 수밖에 없다. 홍세화 선생님께서는 한국의 교육제도, 즉, 암기 위주의 주입식 교육, 객관 문항에 의한 서열화 교육을 프랑스 교육과 대비하여 비판하신다. 프랑스의 교육엔 논술이 존재하고, 다양한 것들을 묻는다. 정치관, 예술관, 삶, 등 분야를 막론하고, 논술할 수 있길 요구한다. 이는 무엇을 말하는가. ‘나’라는 주체가, 가정, 교육, 사회제도에 대하여, ‘주체적’으로 생각을 형성했음을 전제로 하는 것이다. ‘나’의 주체적 세계관이 없이는 절대로 논술을 쓸 수 없기 때문이다. 이와 대조적으로 한국은 철저하게 5지 선다형 객관식 문제를 출제하고, 한국인에게 ‘나’가 아닌 ‘교육 제도’를 그대로 수용할 것을 요구한다. 여기에 ‘나’의 주체적 사고란 존재하지 않는다. ‘나’가 없는 편이 신속 정확하게 문제를 풀 수 있는 길일뿐. 그렇게 한국인은 독서와 토론을 등한시하게 된다. 그에 따라 의식 형성은 비논리성만 갖추게 될 뿐이다. 한국인 개인의 각성, 의식적 전환이 전제되어야 정치가 발전할 수 있으나, 지금까지 묘사한 한국 사회, 교육제도에 의해, 개인은 주체적, 비판적 의식을 갖기 어려운 상황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홍세화 선생님께서 정치적으로 요구하시는 것은 ‘배제된 사람들’의 조직화로서의 진보운동이다. 즉, 비정규직, 그리고 인간의 존엄성이 보장되지 않고, 몸이 고통스러운 분들의 힘을 모아 서로의 권익을 보장하려는 것이다. ‘쉬운 길을 가려는 게 아니다, 어려운 길이기 때문에 우리가 가야한다.’는 선생님의 말씀이 떠오르는 생각들이다. 동시에 내가 스스로 고개 숙이게 되는. 그렇게 나는 ‘보편적 복지’를 떠올렸다. 특히 몸이 고통스러운 사람들을 생각하니, 우선적으로 보편적 복지의 도입이 시급하다고 생각했다. 무상급식 뿐만 아닌, 교육제도에서도 말이다. 하위 소득계층에서조차, 부모님들께서 힘들게 노동하여 얻은 생계비를 자녀의 사교육비에 가장 많이 사용한다. 이 사실은 보편적 복지가 교육과 관련하여 적용되어야 함에 대한 방증이다. 따라서 프랑스와 같은 무상교육 확대, 대학의 재정적 투명성 확보를 거친 합리적인 등록금 제시 등이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교육에서의 복지뿐만이 아닌, 고용 정책에서의 보편적 복지 확산도 시급하다. 

    나 또한 꿈꿔본다. 민중의 집과 같은 진보적인 공간, 사람들이 산발적으로 생겨나길. 그 힘들이 모여 정치적으로 권익을 보호하고, 정당한 권익 보호의 목소리에 대해 사람들이 귀 기울이길. 귀 기울이는 사회가 되기 위해, 그 정도의 의식을 갖추길. 그러한 의식을 갖추기 위해, 비판적으로, 주체적으로 생각할 줄 아는 인간이 되길. 그러기 위한 보편적 복지로서의 교육적 복지가 활성화되길. 우선, 시험부터 사고를 요하는 논술 중심으로 바뀌길. 그렇게 하나하나 바뀌어 건전한 의식을 바탕으로, 배제된 자들의 조직화가 이루어지고, 서로의 존재를 인정하는 사회가 되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