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 장자, 내편 - 인간세 <2> 발제 해설 : 김범석

    두 편의 시를 쓰고, 두 편의 짤막한 산문을 쓰고 보니, 장자 생각을 떨칠 수가 없었다. 어쩌면 이 모든 게 장자의 사상으로 연결되어 있다는 느낌이 들었다. 어찌 그렇다고 할 수 있을까?

    지하주차장에 차를 세우고, 아파트 계단을 올라 1층에 도착하니, 아파트 입구 앞 재떨이 통 옆에 서서 담배를 피우는 아빠를 보았다. 그 모습은 이미 충분히 시에서 설명한 것 같아, 더 길게 묘사할 필요는 없을 것 같다. 그런 아빠는 여느 때의 짜증스럽거나 권태로운 모습이 아니었다. 정말 진지하게, 자기 자신에 대해서, 자신에게 딸린 식구들에 대해서 사색에 잠겨있었다. 그 때문인지, 아빠의 사소한 한 마디 한 마디 말들이 모조리 나를 찌르는 듯 했다. 예전 같았으면, 분명히 아프다고 호들갑 떨었을 나였을 텐데, 오늘은 그런 느낌은 없었다. 그리고 이런 잔상들은 내 가슴에 왠지 깊이 남았다. 아직 군대도 다녀오지 않고, 내 몸조차 스스로 책임지지 않는 내 입장에서, 당신뿐만 아니라 당신에게 딸린 네 명의 식구를 책임지는 가장, 심지어 본인의 직장조차 풍전등화와 같은 입장의 가장을 떠올린다는 것은 쉽지 않았다. 쉽지 않은 만큼 가슴에 깊이 남은 것 같다. 그래서 나는 담배를 피우는 대신 차를 마셨다. 쓰디쓴 차를 마시며, 공책을 찢어, 한 자 한 자 눌러서 글씨를 썼다. 

    처음 쓴 시, ‘예술가’는 마치 담배를 태우는 아빠의 모습이 예술가처럼 느껴져서 쓴 시이다. 예술가는 자신이 작품을 창조할 때, 장자의 ‘무위(無爲)’처럼 자신을 잊고 행위를 하며 자연스럽게 무언가를 한다. 그런데 우리 아빠가 하얀 담배를 슬며시 입에 가져다 대고, 숨을 들이쉬어 빨간 불빛을 만들며, 이어서 하얀색 연기를 허공에 내뿜는 모습들의 연속 그 자체가 하나의 ‘無爲’를 행하는 ‘예술가’ 같았기에, 이런 시를 쓰게 되었다. 특히 조금 덧붙이자면, 원래 아빠가 예술가였는지, 내가 아빠를 보면서 예술가라고 느꼈는지가 너무나도 애매모호하여, 도대체 예술가가 무엇인지 헷갈렸고, 더욱 중요한건, 내가 알던 아빠와 지금의 아빠의 모습이 헷갈려서, 자꾸만 ‘흔들렸다’는 표현을 썼다. 두 번째 시는 조금 더 묘사적으로 담배와 담배 피우는 아빠를 연관시켜 그려본 것이다. 쌀쌀한 가을밤에 뜨거운 숨과 함께 연기를 내뿜는 아빠가 있었다. 그리고 아직 꺼지지 않아서 빨갛게 반짝이는 담뱃재가 흩날리기도 하고, 땅에서 나뒹굴기도 했다. 그리고 동시에 담뱃재는 스스로 사력을 다해, 마지막 그 빨간 열기를 계속 이어가려고 노력하는 것같이 느껴졌다. 그렇게 그 담뱃재와 지금 아빠의 상황이 교차되어 느껴진 것이다. 그래서 이렇게 담뱃재를 묘사하고, 동시에 뜨거운 김을 내뿜는 아빠도 써낸 것이다.

    이렇게 한 바탕 시로 묘사를 하고 나니, 아빠와 내가 대비되어 생각났다. 그래서 쓴 게 ‘사냥꾼과 농사꾼’이다. 경제학과를 나온 뒤, 가족의 생계를 위해, 긴 시간동안 끊임없이 자기계발 하며, 지금의 자리에 있는 아빠가 떠올랐다. 그리고 그런 아빠와는 조금 다른 접근 방식으로 삶을 꾸리려는 내가 떠올랐다. 현실주의적인 아빠와 대비해, 약간은 이상주의적이고 자유주의적인 내 삶이 존재한다. 이러한 것들을 조금은 원시적인 그림으로 그려보고 싶었나보다. 그래서인지 현대에 직접적으로 본인이 경제생활에 종사하는 직장인은 사냥꾼으로, 교육자나 문화, 예술가, 철학자, 대안적인 삶을 사는 사람들은 비유적으로 농사꾼으로 표현해 보았다. 그리고 따지고 보면, 두 삶은 양립할 수밖에 없는 것들이라는 점 또한 생각났다. 

    끝으로, 이 모든 생각들을 장자로 연결시키게 되었던 ‘나를 잊는 시간’이란 짧은 글을 쓰게 되었다. 물론 장자를 염두에 두고 쓴 것은 아닌데, 묘하게 장자와 뗄 수 없이 글이 써진 것이다. 왜 느닷없이 나를 잊는 것에 대해 글을 썼는가? 이 모든 상황들과 글들을 종합하다보니 그렇게 되었다. 도대체 왜? 처음엔 그저 평범한 우리 아빠를 보았는데, 여느 날과는 달랐다. 많이 뭉클하기도, 나를 반성하기도 하였다. 그런데 특히나 아빠의 담배 피우는 모습이, 예술가 같기도 하고, 담뱃재 같기도 한 것이, 아빠와 담배가 하나가 된 느낌이어서, 이 느낌들을 지울 수가 없었다. 반짝이는 담뱃재와 아빠가, 혼연일체로 예술을 하는 예술가와 담배 피우는 아빠가 각각 동일선상으로 느껴졌다. 그에 더하여, 사냥꾼처럼 경제의 굴레 속에 뛰어들어 살고 있는 아빠뿐만이 아닌, 농사꾼처럼 글 쓰고 공부하는 나, 그런 삶을 꿈꾸는 내가 대비되어 생각나기도 하였다. 담배와 사색으로 하나 된 아빠, 글을 쓰며 본인을 잊는 내 모습이 이렇게 동시에 떠오르게 된 것이다.

    그래서 나는 ‘나를 잊는 시간’을 썼다. 그리고 바램으로써, 조금 더 대안적인 입장에서 마지막 글을 쓴 것이다. 인간은 끊임없이 자기를 잊으려 한다. 아빠가 담배를 피우며 생각에 잠기는 것이, 내가 글을 쓰며 생각을 환기하는 것이, 우리가 술 마시고, 춤추고, 노래하고, 그림 그리는 모든 것들이 사실은 내가 사라지고, 행위와 하나 되는 일들이다. 쉬운 말로 ‘집중’한다고도 할 수 있다. 우리는 ‘집중’하면서 ‘나’를 잊는 것이다. 그렇게 자기를 잊으려 애쓴다. 그런데 애를 쓰기는 하는데, 잘못된 방식으로 애를 쓰는 것 같다는 말이다. 담배, 술, 글쓰기, 그림 그리기, 춤, 노래, 때로는 내가 아닌 친구, 등에게 ‘의존’을 하며 ‘나’를 잊는 것이다. ‘나’로부터 ‘나’를 잊는 게 아니라, ‘나’ 아닌 다른 것에게 ‘나’를 내어줌으로써 ‘나’를 잊는 것이다. 그러다보니, 잊는 일은 본연의 것을 모조리 놓는 게 아니라, 그저 순간적으로 ‘나’를 망각하는 일이 되어버리는 것이다. 그러다보니, ‘의존’하는 순간이 끝나버리면, 그러니까, 담배나 술이나 친구가 없어져버리면, 나는 고통으로 빠져버리는 것이다. 시인이 작품을 내놓지 못하는 안타까운 심정처럼. 그래서 조금 더 대안적인 의미(?)와 시도(?)로 ‘나를 잊는 시간’을 썼다. 어딘가에 의존하지 말고, 그냥 홀로 오롯이 존재하며 침묵 속에 나를 잊어보는 것은 어떨까 하는 마음이 생겼다. 물론 나도 그에 도달하진 못했지만, 무수한 것들에 ‘의존’한들 고통만 야기되기에, 문득 든 생각이 바로 ‘나’로부터 스스로 ‘나’를 잊는 시도였다.

    그러고 보니, 왜 ‘나’를 잊어야 하지? 하는 의문이 들었는데, 어쩌면 좀 간단한 것 같다. 우리가 이미 그 맛, ‘나’를 잊는 맛을 알기 때문 아닐까? 앞서 말했듯이, 우리는 술 마시고, 춤추고, 노래하고, 담배 피우고, 그림 그리고, 글 쓰고, 친구와 만나면서 ‘나’를 잊는다. 이미 그것들이 아주 매력적이고 편안하고 행복감을 맛보게 하는, ‘나’에게 고요함을 선사하는 것이라는 사실을 우리는 알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문제는 ‘의존’적으로 ‘나’를 잊는다는 것에 있다. 그렇기 때문에 장자가 ‘오상아’와 ‘심재’, ‘좌망’을 말하며, ‘스스로 잊음’을 말한 것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 것이다.

    끝으로 두 가지 생각이 든다. 하나는, “이런들 어떠하고 저런들 어떠하리.”이다. ‘의존’해서 ‘나’를 잊고 ‘무위’로 곧바르게 나아가면, 물론 어떤 때에는 고통스럽겠지만, 그렇게 할 수도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이미 괜찮지 않겠는가. 덤으로 장자처럼 ‘스스로 잊음’에 도달하면 더할 나위 없이 편안하기도 하겠지만, 뭐 어찌되었든, 먹고 살려면, 주구장창 ‘좌망 심재 오상아’ 할 수는 없는 일 아닐까. 아무쪼록 나머지 하나는 이것이다. 춤추고 노래하고 그림 그리고, 글 쓰고, 악기를 만지고, 공부를 하고, 세상에 다양한 것들이 참 많다. 뭐 다 잘 해서 나를 잊으면 그것 또한 좋겠다. 그런데 이 많고 많은 것 중에 하나도 즐길 줄 몰라서, ‘의존’하며 ‘나’를 잊는 일 조차도 하지 못하는 그런 불편한 사람은 안 되었으면 좋겠다는 생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