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 장자, 내편 - 인간세 <1> 김범석

<예술가>

하얗게 한숨 소리
산산이 흩어지고,
타들어가는 벌건 불빛은
흔들렸다.

아버지,
애증으로 뒤엉켜 한 번을
제대로 부르지 못한 나도
흔들렸다.

예술가,
창백한 가을 밤공기에
하얗게 입김으로 덧칠하는
아버지.

예술가,
언제부터 아버지가 예술가였는지,
내가 아버지를 예술가로 만든 건지,
흔들렸다.

<담배>

가을밤 공기가 차다.
아빠는 자꾸만
뜨거운 김을 뿜어낸다.
깊숙한 폐부에서 올라온
뜨거운 김을

뻐얼건 담뱃재가 흩날린다.
땅바닥에 나뒹구는 담뱃재가
허옇게 변할 적마다
아빠의 가슴에선
뜨거운 김이 새어나온다.

아직 떨어진 불똥은 번쩍인다.
가을밤 찬 공기에 놀란 건가,
뻐얼겋게 사력을 다해 빛 발하는가.
아빠는 주워 담는다.
뜨거운 김을.

<사냥꾼 그리고 농사꾼>

우리 아빤 사냥꾼이다. 사냥꾼 중에서도 우두머리에 가까운 사냥꾼. 매일 아침 일찍 일어나 사냥을 해서, 그 공으로 우리 가족이 함께 밥을 나눠 먹고 산다. 그런데 아들 녀석은 사냥해서 고기를 구할 생각은 안하고, 씨앗 심고, 열매 먹는 짓을 하려한다. 농사꾼이 될 모양이다. 그래서 아빠는 아들을 미워하는 건가. 무딘 돌에 칼을 갈고 먼 곳으로 달려 나가 사냥을 해야 하는데, 집 안에서 낮잠 자다 집 주변만 맴돌곤, 뒷짐 지고 걷다가 씨앗이나 심고, 때 되길 기다리니, 그 모습 볼썽사나운 건가. 그래서 아들은 아빠를 미워하는 건가. 졸리면 좀 더 자고 때에 맞게 일어나, 알맞은 곳에 씨앗을 놓고, 정성껏 돌봐야 하는데, 남에게 뒤질세라 치를 떨고 곁눈질하며 앞장서서 크고 맛 좋기로 유명한 고기들만 골라 잡아오니, 그 모습 못마땅한 건가. 

그런데 서로 미워할 거 없지 않은가? 어차피 인간은 잡식성이잖아. 생각해보면 우리에겐 사냥꾼도 필요하다. 안 그러면 언젠가 사자나 호랑이한테 잡아먹히게 될 거니까. 또 생각해보면 우리에겐 농사꾼도 필요하다. 안 그러면 언젠가 인간이 인간을 잡아먹게 될 거니까.

<나를 잊는 시간>

인간은 본인을 잊지 못해서 괴롭다. 자의식이 본인을 갉아먹어서 괴롭다. 한 모금의 연기를 빨아 폐 속 깊숙이 가득 연기를 채운 뒤, 망연히 허공을 응시하면, 본인을 잊는다. 달고 쓴 술을 입 안에 한 바퀴 굴려 뱃속을 가득히 술로 채운 뒤, 들떠서 친구와 마음을 터놓으면, 본인을 잊는다. 노래하고, 춤추고, 그림 그리고, 글 쓰고, 시 쓰고, 밥 먹고, 모두 마찬가지이다. 자의식과 행위의 뒤엉킴 속에 자꾸만 본인을 잊으려 애쓴다.

그런데, 중요한건, 우린 본인을 정말 잊는 게 아니고, 애를 쓸 뿐이며, 잊은 척 하는 것이다. 절대로 담배, 술, 마약, 노래, 춤, 그림, 글, 식사에 의존해서는 ‘나’를 잊을 수 없다. 단지 잠시 동안 망각할 뿐이다. 망각한 것처럼 느낄 뿐이다.

결국 ‘나’를 온전히 잊는 것은, 어디에도 의존함 없이, 가만히 무위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