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 장자, 내편 - 대종사 <2> 김범석

‘남백자규’와 ‘여우’가 만났다. 여우는 자신이 ‘복량의’라는 인물에게 도를 가르쳐준 일을 말한다. ‘복량의’에게 도를 가르쳐주니, 사흘이 지나자 천하를, 7일이 지나자 사물을, 9일이 지나자 삶을 잊게 되었다. “삶을 잊게 되자 비로소 [환히 눈부신] 깨달음을 얻게 되었소. 깨달음을 얻게 되자 [대립이 없는 도의] 절대적인 경지를 보게 되고, 절대적인 경지를 보게 되니까 고금을 초월하게 되며, 고금을 초월하게 되자 죽음도 삶도 없는 경지에 들어가게 되었소.” 『장자, 내편, 대종사』, 장자 지음, 안동림 역, 현암사, p.p 194 ~ 195 

“안회가 말했다. … 저는 인의(仁義)를 잊었습니다. … 저는 예악(禮樂)을 잊었습니다. … 저는 좌망(坐忘) 하게 되었습니다. … 손발이나 몸을 잊고, 귀와 눈의 작용을 물리쳐서, 형체(形體)를 떠나 지식을 버리고 저 위대한 도와 하나가 되는 것, 이것을 좌망이라 합니다.” 『장자, 내편, 대종사』, 장자 지음, 안동림 역, 현암사, p.p 215 ~ 216

    솔직히 말하면, 나도 어느 정도 ‘장자’와 ‘불교’가 말하는 것, 안다. 인간 속세는 단지, 완전하게 존재하는 것이 아니고, 인간들이 살아오면서 서로가 서로에 의해 만들어낸 것들일 뿐이라는 것. 사회 제도, 도덕 윤리, 생명 윤리, 인간의 존엄성 등에 대하여, 그 관계에 발생하는 제도나 윤리는 사실 인간이 만들어낸 허상이다. 원래부터 있던 게 아니고, 인간이 살다보니, 웃어른 보면 인사하는 것, 물건을 가져갈 때에는 그냥 가져가는 것이 아니라 돈이란 것을 주고 가져가고, 친구한테는 의리를 지키고, 교수님한테는 공손한 말투를 쓰는 것, 부모님을 공경하고, 말씀에 복종하는 것, 등. 사실 다 ‘구라’다. 근원으로 가면, 그 누구도 절대적으로 설명할 수 없다. 그저 자연 생물 개체로 남는 것이 인간이기 때문에. 물론 장자는, 자연의 ‘도’를 따라 움직이면 되기 때문에, 귀한 것 하찮은 것의 분별이 이미 존재하지 않고, 그저 자연스럽게 움직이면 될 뿐이라고 하고, 불교는 만물 속에 ‘불성’이 ‘공(空)’으로 내재하여 있기 때문에 모두를 부처로 대하면 될 뿐이다. 그렇게 현대 서구적 개념인 인간의 존엄성, 윤리 등이 보장되는 것이다.

    그런데 이 사이에 어정쩡하게 위치해 있는 내가 보인다는 것이다. 나는 도(道)에 맞게 사는 게 뭔지도 모르고, 좌망(坐忘), 무위자연(無爲自然)하는 것이 뭔지도 모르겠다. 그리고 불교에서 말하는 ‘불성’이 뭔지도 모르겠다. 반면, 장자가 ‘인위’, ‘인의’, ‘예악’을 욕하고, 고개를 끄덕이고, 불교에서 사물들이 사실은 ‘공(空)’할 뿐, 단지 인연화합, 연기법에 의해 서로 서로 관계망에 쌓여있음을 말하면 고개를 끄덕일 뿐이다. 즉, 장자와 불교에서, 세상 돌아가는 게 사실은 허상이고, 우리가 집착하고 분별하며 시비를 가리는 것이 하등 쓸데없는 짓이라고 꼬집으면 영락없이 그들의 편에 서 있게 된다. 그러나 장자가 말하는 무위자연(無爲自然)의 도(道)도 모르겠고, 불교가 말하는 불성과 ‘공(空)’성을 내 마음과 삶으로 직관할 수 없다.

    게다가, 대학에서 과제를 내주면, 밤을 새며 매달리고, 시험 시간이 되면, 그 누구보다 시험지에 집중하며 팔이 빠져라 글을 써댄다. 길거리의 아무 이발소에나 가서 머리를 자르지도 않고, 거금을 내서 맛있고 질 좋은 것들을 먹는다. 부모의 자금 형편을 염두에 두면서, 내 대학교, 대학원 철학 공부와 학위, 그 이후의 직업과 삶에 대해 끊임없이 고민하고, 어떻게 하면 조금이라도 더 내가 좋아하는 일, 철학 공부와 교육, 글 쓰는 일, 등을 통해 (세상에서 제일 어렵다는) ‘적당히’ 돈을 벌면서 살 수 있도록 내 삶을 보장할 것인지 생각한다. 집착과 욕망의 그물, 그렇게 욕하던 인위, 속세의 허망, 망념에서 움직인다. 

    사실, 요즘 내 머릿속의 결론은 다소 간결하다. 난 확실히 안다. 인위와 사물의 ‘공(空)’한 관계, 그 논리를 안다. 그리고 또한 안다. 내가 인위와 사물 세계의 인연 법칙에서 벗어나도록, 깨달음의 수행을 통하여 ‘무위자연(無爲自然)’의 도(道)와 불교의 ‘불성’과 ‘공성’을 직관하는 경지까지엔 이르지 못할 것이라는 것을 안다. 따라서 ‘참 나’의 길을 그저 걷는 것이다. 인위와 ‘空’한 관계의 한계를 알면 아는 대로 받아들이고, 다만 ‘참 나’가 가진 ‘힘에의 의지’들을 잃지 않도록 한다. 그래서 세속의 한계 속에서도 내가 발하는 빛을 고스란히 가지고 움직이고, 나를 속이는 일을 ‘최소화’하면서, 잠시 나와 타인을 속이더라도 전체적인 맥락은 속이지 않으며 움직이도록 하는 것이다.

    대학교와 대학원을 염두에 두면서 학위를 얻고자 움직이더라도, 시험과 직업에 집착을 하더라도, 적어도 내가 공부하는 것에서 ‘나’를 분리해서는 안 될 것이고, 철저히 내 삶과 공부를 연결시키는 한에서 커리큘럼을 따라가야 할 것이다. 그래서 그 연장에서, 공부를 활용할 수 있도록 해야 할 것이고, 단지 논리와 이성 속에만 머물지 않고, 감성으로 학문을 응용해야하지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