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 장자, 내편 - 양생주 <5> 이정

‎[양생주]는 참된 삶을 누리게 하는 요체를 뜻한다. 자연에 따라 사물에 거역하지 않고 소박하게 살아가는 데에 행복한 인생을 보내는 도가 있음을 강조한다.

1.유한한 인간의 삶으로 한없는 앎을 뒤쫓음은 위태로운 일이다.

2.한 백정이 문혜왕을 위하여 소를 잡은 일

-그의 손이 닿는 곳이나 어깨를 기대고 발로 밟는 곳엔 신기하게 살과 뼈가 손쉽게 덜어졌다. 더우기 칼이 지나면서 들리는 소리는 음율에 맞고 그의 동작은 춤추는 듯 하며 절도가 느껴졌다. 바라보던 문혜왕이 "훌륭하도다! 어찌이런 경지에 이를수가 있는가?라고 말하자. 포정이 칼을 놓고 대답하였다. "처음 제가 소를 잡았을 적에는 보이는 것 모두가 소였습니다. 그러나 3년 뒤에는 완전한 소가 보이는 일이 없어졌습니다. 지금에 이르러 저는 마음으로 소를 대하지 눈으로 보지 않습니다. 소의 본래 구조에 따라 칼을 쓰므로 힘줄이나 질긴 근육에 맞서는 일이 없습니다."

3. 노자의 죽음 그리고 진일과 제자.

-늙은이는 마치 자기 자식이나 잃은듯이 곡을 하고, 젊은이는 마치 자기 어머니나 돌아간 듯이 곡을 하데. 그가 사람의 정을 이렇게 모은 까닭은 반드시 그가 사람들에게 칭찬하는 말을 해달라고 요구는 안했을 망정 칭찬하는 말을 하게 작용했고, 곡을 해달라고 요구는 안했어도 곡을 안 할 수 없도록 작용을 가했기 대문일세. 이것은 천도에서 벗어나고 자연의 정을 배반하여 타고난 본분을 망각하는 것일세.

    Vol 1.

    자연의 순리, 이쯤되면 장자가 도대체 어떤생각을 가지고 또한 어떠한 가치관을 지녔는지 파악이된다. 소요유부터 장자사상의 요체라 불리는 제물론까지 그는 사람들에게 자연에 대한 이해 및 물흐르듯 자연스러운 삶을 이야기한다. 때로는 꾸짖고 빈정거리며 때로는 자연의 삶을 찬양하며 그렇게 천천히 자연스러운 삶에대한호기심을 자아내고있다.

    양생주, 양생주라함은 참된 삶을 누리게 하는 요체, 간단히 말하자면 삶의 지헤라 할수있겠다. 그렇다면 도대체 참된 삶을 누리게하는 참된 요체, 즉 삶의 지헤란 무엇일까? 나는 오랜시간동안 이문제에 대하여 고민해왔다. 물론 지금도 늘 고민중이며 들여마시고 내쉬듯 숨 쉬는 연습을 하고있다. 미약하게나마 나의 생각들에 집중하면서 알아낸 것은 사실 참으로 간단하다. 태초부터 이미 그렇게 하도록 짜여진 시스템, 그곳에는 옳고 그름이 없으며 그저 하도록 설계되어있다. 가령 숨을 쉬라고 해서 쉬는 사람이 있을까? 밥을 먹으라고 해서 먹는사람이 있을까? 잠을 자라고 해서 자는 사람이있을까? 이러한 일들을 생명을 유지하기위해 필수 불가결한 일들이다. 

    그런데 과연 이렇게 '중요'한 것들에 대해서 공부하고 사유하며 알고있는 혹은 알려고하는 사람들은 얼마나있을까? 잠은 생명에게 어떤역할을 하고 나의 몸으로 들어간 무엇인가가 어떤 작용을 통해 에너지로 순환되며 지금 나의 몸이 어떤상태인지를 알고있을까? 물론 속없는 혹자들은 자신들은 알고있다며 잠은 피곤을 풀어주고 지방은 살을 찌우며 열이나면 감기가 걸린것이라 답할지 모르겠다. 그것도 맞는 말이다. 다만 장자의 맥락에서는 그곳에서 한번 더 나아가 그저 신체뿐만이 아닌 나의 마음, 감정과도 연결시킬 줄 알아야 그것을 안다할수 있지 않을까 사료된다. 

    물론 여기서 중요한것은 '안다'라는 사실이 아니다. 장자가 누려왔고 얘기하고있는 행복에 대해서 말하는 것이며 장자또한 기본적으로 내재된 생명의 원리에 귀를 귀울여 많은사람들이 멀리 돌아가지않고 가장 가까이있는 내속의 소박한 행복을 찾길 바라는 마음일것이다. 

    Vol 2.

    하지만 나 또한 많은 길을 돌고 또 돌며 헤매었다. 포정의 이야기처럼 내가 보고 있던것은 '소'였으리라, 그저 주어진 환경과 보이는것에 따라 흘러가던 것처럼 말이다. 나는 이땅에 태어난지 8년도 채안된 시간부터 초,중,고 12년, 더 많게는 16년동안을 학교라는 작은 사회 자연아닌 사회속에서 시간을 보냈다. 사회와 내재된 자연속에서의 괴리감, 그리고 그속에서의 더 강렬한 이끌림. 마치 (?)의 주인공처럼 사회와 생명의 엇갈림 그리고 모순된 사회를 바라보며 끊임없이 답답하고 동시에 허무하며 때로는 분노하는 시간을 보냈었고 그 무엇보다 혼란없이 확인하고 싶었다. 내 안에서 요란하게 부딪히는 기원을 알수없는 종자에 대하여, 판단하고 싶었고 혼란속에서 빠져 나오고싶었다.

    다만 이제는 말할수 있다. 나는 혼란속에서 나와 나라는 그림속에 곧은 선 그릴수 있었는데 , 이것은 의외로 간단하다. 인간에게는 크게 본능적인것이 있고 사회적인것이 있다. 본능적인것은 내재된 것이며 사회적인것은 종의 유지를 위해만들어진 것이다. 하지만 현재 다수의 인간들은는 어떤것에 큰 비중을 두고 있던가?

    비슷한 예는 눈앞에서도 찾아 볼수있다. 인간은 생명을 본따 생명이 하는 일을 대신해주는 기계를 만들었다. 하지만 그 기계는 on/off 스위치로 작동할뿐 언제나 뜀박질하는 심장을 갖고있진 않다. 기계는 사회적인것이요 생명은 본능적인것이다. 그렇다면 기계의 역할은 무엇이던가? 바로 생명을 도와 편의를 도모하는것에 기계의 본질이 있는것이다. 다시, 사회적인것또한 본능적인것을 도와 질서,유지를 위한 하나의 장치인것이다. 

    그렇다. 생명을 가지고 사회속에서 살아가며 생겨났던 알수없는 공허함과 꼬리에 꼬리를 무는 상념들은 잘못된 활용으로 인한 장애였던것이다. 과연 나를 이루고있는것이 생명인지, 사회적으로 만들어 낸것인지 내가 찾아가야 혹은 중심으로 베이스를 두어야하는것이 사회적인것인지 내재된 생명의 원리인것인지처럼 목적인 전치되고 주객이 전도되는 혼란속이었던 것이다. 나는 이 혼란을 아무에게도 영향받지않고 오롯한 나를 들여볼수있는 시공간속에서 확인할수 있었고 그제서야 나라는 새하얀 도화지 위에 생명이라는 살아있기 위한 힘의 바탕이 되는 선 하나를 그릴수 있었던 까닭이다. 결국 포정의 이야기처럼 나는 소를보며 이것이 무엇인지 괴로와하다, 천리를 따라 눈을감고 정신의 자연스런 작용으로 다시금 소를 볼수있었던것이리라, 물론 아직 소의 윤곽만 그려댈뿐이지만 말이다. 

    아무튼 이러한 양생주편의 이야기는 2000여년의 세월이 지난 지금의 시대에도 절묘하리만큼 맞아떨어진다. 곧바로 '눈'만을 뜨게해 눈앞의 것만 보며 눈에 보이지 않는것들은 볼수없도록 무섭게 쏟아지는 당위와 해내야만하는 일들, 그리고 다람질 쳇바퀴돌듯 반복되는 굴레속에서 파생되는 수많은 병들. 모두들 양생주 한잔 마시고 그곳에서 훌쩍 뛰어나와 모두의 세계를 볼수있노라면 좋겠다. 이것이 2000년동안 내려오던 장자의 혼이 하고 싶던 이야기가 아니였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