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 장자, 내편 - 양생주 <3> 김범석

    1.

    ‘교육’도 하나의 ‘예술’ 아닐까? 그리고 이 ‘예술’이라는 건 어쩌면 장자가 말하는 ‘道’와 통하는 면이 있지 않을까? 요즘 주변 상황이 나를 이래저래 ‘교육’에 대해 생각하게 만든다. 내가 지금 몸을 담고 있는 곳, 앞으로 몸을 담고 싶은 곳, 그곳이 바로 교육과 학문의 장이기 때문에 더욱이 ‘교육’에 대해 생각을 하지 않을 수 없다. 그리고 “‘교육’은 수단으로 존재하는가, 목적 그 자체로 존재하는가?” 하는 물음이 던져졌을 때, 나는 선뜻 목적으로서 존재하는 교육을 떠올릴 수 있었는데, 그 과정에서, 어쩌면 ‘교육’이 ‘예술’과 ‘道’와 맞물린다는 것이 느껴졌다.
    ‘교육’은 다양하게 해석될 수 있는데, 역사적으로 살펴본다면, 그 시대에 맞는, 혹은 그 지역에 맞는 인간상이 공공연히 주어져있는 셈이다. 가령, 스파르타에선 국가를 보호할 군사적인 시민이 필요하여, 도둑질 등을 교육하곤 소년에게 재치와 순발력을 길렀던 것이 그 예가 될 수 있다. 이렇게 교육에서의 인간에 대한 이데아는 매 시대와 지역을 전제로 다양하게 나타나고 이러한 다양한 이데아에 따라, 교육자는 인간을 만들어낸다. 그리고 이때, 바로 ‘예술’과 ‘교육’이 맞닿는 지점이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분명히 예술가는 자신의 이데아를 작품에 구현할 것이다. 물론 말을 물고 늘어지며, 대체 이데아가 어디 있느냐, 순간적인 감정을 발산하는 것은 예술이 안 되느냐, 하고 되물을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데아를 플라톤이 사용한 고전적인 의미로부터 확장시켜서, 보편적인 ‘관념’, ‘인간에게 내재된 형이상의 무언가’로 받아들이자면, 결국 예술도 인간 내면의 형이상학적 무언가를 외부로 표출한다는 사실, 결국 작품을 만들어내고, 작품을 통해 타인과 의사소통을 한다는 아주 기본적인 전제들은 변하지 않는다. 예술가, 작품, 수용자, 작품에 대한 예술가의 투영, 작품을 통한 수용자의 이해 등은 필연적으로 예술적 과정 안에 내포되어 있는 것이다. 
    또한 이러한 ‘예술’에서의 맥락과 마찬가지로, ‘교육’도 비슷한 양상을 띠고 있다고 생각한다. 즉, 교육자, 제자, 제자 및 스승과 소통하는 사회구성원, 제자에 대한 스승의 투영, 제자 및 스승과 사회와의 유기적인 의사소통은 마치 ‘예술’을 구성하는 요소들과 별반 다르지 않게 존재하는 것이다. 
    특히 내가 주목하고 싶은 것은 사실 이러한 ‘교육’과 ‘예술’을 구성하는 요소들 사이의 유사성만이 아니다. 사실 그보다는 예술가와 작품 사이에 발생하는 의미와 스승과 제자 사이에 발생하는 의미 그 자체, ‘관계’에 주목하고 싶은 것이다. 즉, ‘교육’ 과 ‘예술’이 목적 그 자체로서 존재하는 건 어쩌면, 예술가와 작품이 관계맺음 하는 그 순간, 스승과 제자의 관계가 실제 하는 그 순간 아닐까 한다. 그리고 이렇게 받아들인다. 예술가가 작품을 구현하듯, 스승은 제자를 구현해 낸다고. 작품을 구현하는 과정 그 자체에서 예술가가 끊임없이 변화를 거듭하듯, 스승 역시 제자를 대하는 과정에서 또한 변화를 거듭한다고.
    이러한 맥락 속에서 장자의 ‘道’는 나에게 또 다른 의미로 다가온다. 내가 실제로 걸어왔고, 걷고 있으며, 앞으로 걸어갈 길인 ‘교육’에 대해서, ‘예술’과도 같이 여길 수 있는 ‘교육’에 대해서, 나는 어떠한 자세로 그를 대해야 하는지, 장자는 명확하게 알려주고 있는 것이다. 

    포정은 문혜군에게 말한다. “제가 반기는 것은 도입니다. 재주 따위보다야 우월한 것입죠. 제가 처음 소를 잡을 때는 눈에 보이는 것이란 모두 소뿐이었으나, 3년이 지나자 이미 소의 모습은 눈에 안 띄게 되었습니다. 요즘 저는 정신으로 소를 대하고 있고 눈으로 보지는 않습죠. 눈의 작용이 멎으니 정신의 자연스런 작용만 남습니다.”
자신의 기술에 앞서는 것은 ‘道’이다. 그 경지에 오르기까지, 처음엔 자신의 감각에 의존해 소를 보았고, 이내 소를 보지 않게 되었고, 이어서 ‘道’와 ‘天理’에 따라 자신의 행위를 계속하게 된 것이다. 그리고 이를 쉽게 말하면, 사사로운 정감에 좌우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행위를 하는 것에 홀연히 집중하고, 따라서 행위에 부자연스레 걸리는 것이 없도록 자연스레 자신이 이끌리는 대로 움직이는 경지에 이르게 된 것이다. 물론 그 경지에 이르기 까지, 물리적인 시간으론 3년 그 이상이 걸렸다고 하는 것이고, 도에 이른 것은 그가 소를 잡는데 쓴 노력의 결과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교육’ 역시 장자의 ‘도’와 마찬가지라고 생각한다. 굳이 스승만이 교육에서의 중심적인 위치이겠느냐 만은, 비유적으로 포정을 스승으로 여길 수 있다. 아니, 비유적인 것이 아니라 직접적으로 장자에서도 포정은 문혜군, 임금의 스승으로 등장하지 않는가. 포정이 고기를 자르고 임금은 그걸 눈으로 지켜보며, 깨달음을 전해 들으며 ‘양생의 도’를 깨쳤다고 한다. 이 말에 바로 ‘교육’이 이루어지고 있음을 알 수 있는 것이다. 이처럼 스승은 제자가 어떤 제자이더라도, 결국엔, 그가 가진 감각이나 외부적인 집착으로 제자를 대하지 않고, 그저 있는 그대로, 자신과 제자 사이에서 발생하는 물음들과 대답의 연속으로, 둘만이 공유하는 특별한 시간 속에, 직접적으로 교감하는 시간과 관계를 벗어나서 세상을 마주하는 시간까지 통틀어, 그 구분할 수 없는 시간의 소용돌이 속에서 서로가 서로에게 ‘교육’의 관계 하에 삶을 사는 것 아닌가 한다. 
    이런 의미에서 나는 고등학교의 스승들로부터, 그리고 지금의 교수님으로부터 배운 것들이 참 감사하다. 몸이 아픈 학생을 스스로 인도해주는 고등학교 스승님, 어린 내가 건방지게 인생을 운운해도 등 한 번 쓰다듬고, 자기 인생을 돌아보는 스승님. 제자에게 자기 형이 하는 식당에 데려가 같이 식사하면서 소소하게 이런 저런 인생 조언도 해주는 교수님. 이들 모두가 하나의 살아있는 교육을 하는 것 아닌가 한다.

    특히 큰일은 아니지만 어제 있던 일도 떠오른다. 교육철학 수업시간이었는데, “소크라테스는 왜 당시의 다른 소피스트와 달리 돈을 받지 않았을까?”하는 주제에 대해 토론하고 발표하고 있었다. 거의 대부분이 적극적으로 토론하고, 답을 구하려 했으나, 딱히 특별하게 정리되는 것은 느끼지 못했다. 그렇게 시간이 막바지에 다다랐을 즈음, 교수님께서 이런 말씀을 했다. “소크라테스에게 교육자는 단지 산모가 아이를 낳도록 도와주는 산파처럼 옆에서 도와주는 것을 할 뿐, 결국 지식을 깨닫는 것은 제자 본인이기 때문에 돈을 받을 필요가 없었을 수도 있습니다. 그리고 더더욱 중요한 것은, 스승으로서의 소크라테스는 제자와 스승의 차이를 ‘지와 무지’라는 백지장 하나의 차이로 두었을 뿐, 결국 스승 역시 제자와의 직접적인 관계 속에 끊임없이 변화하는 자기성찰, 자기 탐구를 했을 것입니다.” 그리고 어느덧 이러한 정리를 들으며, 나의 목덜미에서 찌릿한 전율이 오르는 것을 느꼈다. 그리고 지금 생각해 보건데, 교육자에 대한 교수님의 말씀이나, 장자의 道에 따른 養生이나 같은 것 아니겠는가, 싶었다.

    2.

“못가의 꿩은 열 걸음 걸어서 겨우 한 입 쪼아 먹고, 백 걸음 걸어서 한 모금 마시지만, 새장 속에서 길러지기를 바라지 않는다. 새장 속에서는 먹이가 충분하여 기력은 왕성하겠지만 속이 편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이 절묘한 묘사는 어쩜 이리도 지금 우리의 교육 현실과 닮았던가. 스승이든, 제자든, 꿩과 같아서, 정해진 과목이 아니라, 인생에서 마주치는 수많은 것들을 교류하는 것이 더 실제적인 앎 아닌가. 그런데 지금은 그게 아니라 말 그대로 장자의 ‘새장’처럼, 입시니, 취업이니 하는 제도의 굴레 속에, 얼마나 많은 스승과 제자는 꿩 대신 닭이 되어 가는가. 말 그대로 ‘속이 편하지 못한’ 교육이 바로 여기 있는 것이다. 

    얼마나 가여운가. 나 역시 입시를 준비했던 사람으로서, 매일 아침마다 버스에서 서서도 졸면서 학교로 기어들어가, 수업시간마다 고개를 떨어뜨렸다. 병든 닭처럼. 물론 어떨 때는 지금도 그런다. 병든 닭처럼. 그리고 이런 생각을 한다. 과연 집단에 해당하는 방향성이 있느냐고. 물론 개별적인 방향성은 있다. 그런데 그 개별적인 방향성이 ‘제도’라는 ‘새장’에 갇혀 날개를 펴지 못하는 일 역시 답답하지 않을 수 없는 현실이다.

    이는 왜 그런가? 내가 보기엔, 교육이 수단으로 전락했을 때 발생하는 문제인 것 같다. 앞서 말했듯이, 사실 스승과 제자가 만나는 순간엔, 교육 그 자체만 존재한다. 그 이상의 무엇이 있지 않다. 내가 철학을 공부하고 그 공부한 것을 교수님의 말을 통해 되짚으며 배울 때 느끼는 감흥은 교육과정이 진행되는 그 순간에 어김없이 나타난다. 그런데 어느덧 우리의 삶에 있어서의 교육은 목적으로서의 성질을 잃어버렸고, 그보단, 학점과 취업, 혹은 수단으로서의 무언가로 변질된 것이다. 이렇게 제도의 굴레 속에 그저 스쳐 지나가는 통로처럼 변해버린 교육의 성질은 장자에 나타난 ‘새장’과 다름이 없는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새장’ 속에서 보장된 학위와 교육 내용들을 꾸역꾸역 주워 먹지만, 너무나 배가 부른 나머지 식곤증에 졸아대고, 지루함을 이길 수 없어 한다. 그렇게 매번 어쩌다 새장 밖으로 나가게 되거나, 다른 새장으로 옮겨갈 때가 닥치면, 그 불안과 권태를 또다시 이길 수 없어 하며 고통 받는 것이다.

“그가 어쩌다 이 세상에 태어난 것은 태어날 때를 만났기 때문이며, 그가 어쩌다 이 세상을 떠난 것도 죽을 운명을 따랐을 뿐이야. 때에 편안히 머물러 자연의 도리를 따라간다면 기쁨이나 슬픔 따위 감정이 끼어들 여지가 없는 걸세.”

    노담이 죽었을 때, 진일이 말한 구절이다. 즉, 사람이 세상에 나고 돌아가는 건 그저 자연의 순리일 뿐, 인간의 감정이 어찌할 수 있는 게 아니라는 것이다. 이는 ‘교육’이 수단으로 전락해버렸을 경우에 나타나는 시름과 고통들을 바라보는 입장과도 같다고 생각한다. 앞서 새장에 갇힌 꿩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오늘날의 교육은 무언가를 위한 수단, 통로로 여겨지는 것이 일반적이다. 가령, 초등학교와 중학교, 고등학교는 대학 입시를 위한 교육제도로 존재한다. 그리고 대학의 본질은 희미해지면서, 결국 취업의 수단으로서의 교육제도로 대학이 자리 잡게 되었다. 그렇게 우리를 희망고문 하는 것이다. 미래에 무언가가 더 나은 것이 있는데, 지금 당장은 좀 그렇고, 지금 이 과정들을 거치면 곧 다음 과정에 오를 수 있으며, 부귀영화를 누릴 수 있을 것처럼 말한다.

    끊임없이 교육이 수단으로 전락함에 따라, 희망고문은 결코 멈추지 않는 것이다. 돈과 취업을 목적으로 하는 하나의 수단으로서 교육이 존재하기 때문에, 우리는 새장에 갇힌 병든 닭이 되는 것이고, 노담이 죽었으매 슬피 울어 젖히며 제사에 임하는 사람들이 되는 것이다. 노담이 세상에 태어나고 죽는 그 자연스러운 이치, 걸림이 없는 천리는 ‘道’이다. 그리고 ‘교육’에서 스승과 제자가 만나 관계를 맺으며 무엇이든지 주거니 받거니 하는 것 또한 분명 ‘자연스러운 道’일 것이다. 그러나 수단에 갇혀버린 교육은 계속해서 부자연스러운 것, 인위적으로 꾸며진 것, 그렇게 억압되고 자신의 자연스러움을 재단하는 감정들만 양산하는 것이다. 사실 교육은 매 순간 벌어지고, 실재하는 그 순간엔 교육이 목적 그 자체로서 존재하는 것인데 말이다.

    나는 지금까지 말했던, 포정처럼, 혹은 열 걸음씩 백 걸음씩 걸으며 먹고 마시는 꿩처럼, 지금 당장 여기에 있는 내가 어떤 교육을 받고, 관계하느냐가 사실은 더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분명 포정은 정신과 道로 고기를 써는 경지에 오르기까지, 무수한 교육을 거쳤을 것이다. 소를 스승삼아, 자신의 칼을 스승삼아, 시간을, 인내를, 다른 포정을 스승삼아 말이다. 새장에 갇히지 않는 꿩도 일상에서 교육을 거치는 것 아닐까. 열 걸음 걸어 한 모금 쪼아 먹을 동안, 백 걸음 걸어 물 한 모금 마실 동안, 매 순간, 매 걸음걸음마다 살아있는 자신을 마주하며, 위험한 주변의 상황을 주시하며 실존하는 것 아닐까. 이보다 더 살아있는 교육이 어디에 있겠나. 

    나도 그렇다. 내가 철없이 굴어 사고에 휘말려 고개를 숙이고 스스로에게 죄를 묻고 있을 때, 무의미한 삶을 생각하고 있을 때, 보잘 것 없는 나에게 시와 책을 건네던 스승들이 바로 나를 바꾸었고, 나는 시를 건네받은 순간, 자숙하며 책을 읽고 상담을 하는 순간, 그 순간순간들에서 나를 바꾸는 힘들을 얻었다. 이게 바로 삶의 연장선상에 존재하는, 포정에 이르고, 새장을 떠난 꿩에 이르는 교육 아니겠는가. 물론 어떤 의미에선 책상에 앉아 누가 어떤 명언을 남겼노라고 배우는 것들도 무시 못 할 일들이지만, 내 삶과 맞닿아 진정성 있는 사건들의 연속 속에 서로가 정신을 공유하는 교육의 순간이 그 자체로, 그 이후로도 의미를 갖지 않겠는가.

    이렇듯 나는 결국 ‘교육’과 ‘예술’과 ‘道’가 하나 됨을 말하고 싶다. ‘道’가 포정의 신묘함, 꿩의 자유로움, 노담의 자연스런 죽음을 포함하듯이, ‘예술’도 분명 예술가와 작품이 하나 되는 자연스러운, ‘참 나’가 곧바르게 나아가는 것을 내포할 것이다. 그리고 그렇게 ‘교육’ 역시 출세의 수단으로서만 존재하는 것이 아닌, 제도의 ‘새장’ 속에 존재하는 것이 아닌, 자연스러운 ‘묻고 대답하는’ ‘구하고 얻는’ 관계 그 자체가 된다는 것을 말하고 싶다. 지금 이렇게 서로의 글에 귀 기울이고 생각을 곱씹는 것처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