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 장자, 내편 - 제물론 <3> 하상현

    솔직히 장자의 두 번째 장을 보고 조금 당황했다. 먼저, 첫 번째 장은 이야기 중심으로 자유로운 삶의 모습이 어떤 것일 까 생각해보았으면 되었으나, 두 번째 장은 장자가 말하는 그런 자유로운 삶의 ‘상태’에 대해서 철학적으로 자세히 이야기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그 깊이 또한 깊어서 쉽게 넘어갈 수 있는 장이 아니었다. 두 번째로는 내가 지지하고 있는 사상과 많은 차이점과 충돌이 있기 때문에 쉽게 흡수할 수 없었다. 특히 진리와 옳고 그름, 인식에 관한 사상이 극과 극으로 달랐기 때문에, 또한 그럼에도 불구하고 장자의 사상이 깊고 배워야 할 것이 많았기 때문에 이 두 번 째 장은 배우고 싶은 마음과 비판하고 싶은 (비판 해야 하는) 마음 때문에 읽기가 쉽지 않았다.

    먼저 전장에서 장자와 혜자의 대화로 장자를 다각적인 시각으로 보는 절대주의자 라고 했던 것은 오해였다. 장자의 핵심사상을 자세히 푼 두 번째 장을 보았을 때 장자는 절대주의자가 아니다. 옳고 그름을 분별하지 않는 것이 가장 기초적인 열린 마음이라고 장자는 말하고 있다. 이것에 대해 범석이가 지적했던 순환오류라고 말했던 부분인 ‘노장 사상이 있는 그대로를 받아드리라고 말한 그 자체가 하나의 체계를 주입시키는 것이 아닌가?’라고 말했던 부분을 다시 집고 넘어가고 싶다. 이것이 과연 그저 말장난에 불과한 언어에서 나온 착각인지 아니면 실제로 사상체계의 모순인지 하는 점이다. 나는 후자라고 생각한다. 철학적인 체계의 조건 중 하나는 내부적으로 모순이 없어야 한다는 것이다. 많은 사상들이 위배하는 것 중에 하나가, 자신의 사상이 말하는 바에 자신의 사상 자체는 포함시키지 않는 것이다. 장자의 사상도 이러한 비판을 피하기 어려워 보인다. 예를 들면, 옳고 그름을 초월하여 꿰뚫어 본다는 말은 옳고 그름에 메이지 않는다는 것, 더 나아가 옳고 그름 자체가 존재하지 않는 것인데, 장자가 글을 저술한 것, 그의 사상을 말하는 것 자체가 자신의 사상이 옳다는 것을 전제로 하는 것이며, 이것은 조삼모사의 원숭이처럼 어느 한쪽만 절대시하는 독선이 되기 때문이다.

    이것 외에도 동양철학에는 실제로 여러 가지 모순점들이 있다. 하지만 분명 이는 서양철학의 관점(분별하고 시비를 가리는)안에서 이다. 장자의 사상이 모순이 있다고 하지만, 그의 사상 안에는 그 모순 자체가 실제의 참 모습이라고 한다. 이 때문에 모순을 기준으로 동양철학 자체를 비판하는 것은 불가능하게 된다. 중요한 것은 우리가 이 ‘모순’을 과연 받아드릴 수 있는가? 어떻게 받아드릴 수 있는가 인 것 같다.

    철학자들이 왜 그런 세세한 문제들까지 시비를 가리고 분류해내고 섬세하게 구조화를 하는지에 대해 일견으로 볼 때 ‘철학은 정말 이론을 위한 학문일 뿐이고 탁상공론일 뿐이다.’ 라고 생각한 적이 있었다. 그렇기에 철학은 골치 아프고, 쓸모 없는 것으로 여겼었다. 그러나, 어느 순간 깨닫게 된 것은, 철학은 우리의 생각과 선택의 근본을 이루고, 철학자들이 다루는 그런 섬세한 사항들은 실제 삶에 긴밀하게 연관이 있다는 것이다. 어떤 사람이 만약에 장애인을 존중한다고 할 때 그는 절대 그저 그러는 것 아니다. 그것은 그 사람이 장애인을 존중’해야한다’는 가치관을 가지기 때문이고 그 가치관은 어떠한 사상적인 기반과 관계가 있다.

    의문이 들었던 것은 장자가 말하는 옳고 그름이 해체된 세계를 그 자체로 보는 것이 우리의 삶에 어떤 영향을 줄 것인가? 하는 것이다. 분별심의 마음을 버리고 양쪽을 동시에 보는 것은 이해의 폭을 넓혀 주긴 하지만 실제적으로 우리가 두 가치 중 하나를 선택해야 할 때 곤란함을 겪을 것이다. 만약 아동성폭행범의 행동과 그 사람의 생각에 대해 판단할 때, 장자가 말한 대로라면 그를 옳지 못하다 해서는 안 된다. 상대주의자 시각으로도 그렇다. 그의 가치를 틀렸다 해서는 안되고 다른 그대로를 인정해야 하는 것이다.

    인간의 뇌는 좌뇌와 우뇌로 이루어져 있고, 이 두 뇌는 전혀 다른 기능을 한다는 것을 발견한지 100년도 채 되지 않았다고 한다. 좌뇌는 논리, 분석, 언어의 뇌고 우뇌는 직관, 종합, 형태의 뇌이다. 장자가 말하는 종합적인 인식의 상태에 들어 갈 때에는 분명 우뇌가 사용되는 상태에 이를 것 같다. 주로 예술활동을 할 때 이러한 상태가 나타나는데, 이 상태에서는 말이 사라지고, 나 자신을 잊게 되는 무아경에 순간에 빠지게 된다. 장자의 두 번째 장을 읽으면서 이러한 새로운 인식상태에 대해서 생각하고 느낄 수 있었다. 

    특히 손가락과 말 장에서 내가 가진 인식이 완전히 뒤바뀌는 경험을 했다. 논리학파의 공손룡은 손가락을 가지고 손가락이 아님을 밝히려고 했다. 내 손가락은 개념으로써의 ‘손가락’이라는 단어와 다르다는 것이다. 이를 곰곰이 생각해보면 새로운 시각에 도달할 수 있다. 손가락을 ‘손가락’이라는 범주에 넣어서 항상 생각을 하고 있는데 이 공손룡에 시각에서 보게 되면, 그런 개념에 손가락을 넣지 않고 손가락을 그 자체로 바라볼 수 있게 해준다. 우리 주변의 물건이 모두 그럴 것이다. 필통과 그 안에 있는 펜들 종이와 책들 항상 잃어버리는 우산, 지나가다 마주치는 페인트 통들까지.. 우리 주변에 모든 것들은 그 ‘개념’으로 축소되는 것이 아니라 각각의 개별적인 사물로, 특별한 존재로 변모하는 것이다. 내 손가락은 그 누구의 손가락과도 다른 모양이며, 설령 같은 모양이라 할지라도 손가락이 있는 위치와 그 손가락이 한 일들, 손가락에 담긴 기억들이 다르다. 세상엔 그 어떤 것도 같은 것이 없다는 사실을 인식하게 되는 것이다.

    마그리트의 작품인 ‘이것은 파이프가 아니다’라는 작품이 생각이 난다. 그 작품에선 캔버스에 파이프 그림과 ‘이것은 파이프가 아니다’라는 문구가 쓰여져 있다. 그것은 파이프가 아니라 파이프를 그린 그림이라는 사실을 일깨워 준 것이다. 다시 말하면 그 작품은 파이프라는 개념에 속하는 것이 아니라, 캔버스라는 가상공간에 물감으로 그려진 파이프인 전혀 다른 존재라는 것이다. 언어나 기호가 지시하고 있는 대상에서 벗어나 그 사물 자체를 그대로 인식하는 것, 인식의 눈꺼풀을 벗겨준 것이다.

    장자는 더 나아가 손가락이 아닌 것으로 손가락이 손가락 아님을 밝힘이 낫다고 했다. 말을 놓고 생각 했을 때 말의 개념이 말 자체가 아님을 말이 아닌 소나 개를 가지고 설명한다. 소와 말은 다르다, 하지만 짐승이라는 점에서 같다. 이런 식으로 장자는 세상을 분류하여 쪼개는 것이 아닌 하나로 보는 인식을 보여주었다. 처음 이런 인식을 접했을 때, 무슨 말인지 헷갈렸을 뿐이지만, 나 스스로가 세상을 쪼개는 방식으로만 인식하고 있음을 알아차렸을 때야 장자가 말하는 인식의 위력을 느낄 수 있었다. 세상을 분류하는 방식만큼이나 세상을 하나로 보는 방식이 타당함을 느꼈을 때, 그리고 사물을 바라볼 때, 전혀 다른 방식으로 사물들이 보였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