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 장자, 내편 - 제물론 <2> 사물을 고르게 하다 : 김지원

    밤사이 꿈을 여러번 꾸다가, 아침에 깨어 시계를 보면 10시. 아 늦었다 싶다가 다시 깨어 시계를 보니 새벽 5시. 음, 더 자도 되겠군 하며 잠이 들려고 할 때 즈음 들리는 엄마 목소리. "김지원!!!! 밥 먹어!!!" 꿈이겠거니, 싶어 다시 자려다가 시계를 보니 8시. 이게 진짜구나 싶어 벌떡 일어난다. 어찌됐건 우린 우리가 꿈을 꾼 것이라는 걸 깨닫는다. 

    악어떼 아이들을 만나며 나는 늘 배운다. 아, 모두가 공유한다고 생각했던 가치가 이 아이들에겐 생소한 것이구나. 내가 늘 왜? 어떻게? 라고 생각하던 것들이 이친구들에게는 당연한 것이구나. 무엇인가에 이름을 붙이고, 이것과 저것을 나누고, 재고, 따지고, 하는 짓거리들을 우리가 과연 멈출 수 있을까? 그것은 우리가 막 걸음마를 때고 엄마를 엄마라 부르고, 아빠를 빠빠라 부르기 시작할 때 부터 시작된 것이 아닌가. 나는 2-3살 때, 다른 아이들보다 말을 일찍 배웠기 때문에 똑똑한 아이라고 할머니는 늘 말했다. 말을 일찍 배워 이것 저것을 분별하기를 남들보다 일찍한 것이 내가 이렇게 구분짓기를 좋아하고, 편견과 선입견에 홀려 진정한 것을 놓치는 이유일까? 이것이 똑똑한 것이라면, 나는 멍청해지고 싶다.

    장자에게 똑똑한 것은 무엇일까? 그것은 도를 깨우친 사람일 것이다. 도는, 이것이네, 저것이네 하는 차별의 범주를 넘어선 '보편적인' 것이며, 보편적인 것이란 '쓸모있음'을 이야기한다. 쓸모있음은 통함이요, 통함은 즐거움이고, 즐김은 도에 가깝다 했으며, 있는 그대로를 그렇다 함이라 했다. 그러면서도 그런 줄을 모르는 것.

    평상시에 나는 이런 상태가 될 수 없으나, 의식적으로 혹은 '새로운 상태'에서 그리될 수 있다. 

    제작년 필리핀으로 여행을 갔을 때에 나는 한달여의 시간 동안 나 아닌 나로 많은 시간을 보냈다. 범석이가 인도에 처음 도착했을 때에 흙먼지와 혼잡이 짜증으로 다가왔었다고 했었나, 그러나 곧 그것이 타자의 시선이었음을 깨달았다고 했었나. 
    난 마닐라에서 매춘부와 사랑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었었다. 그 여자는 자신이 사랑을 하고 있다고 했다. 수 많은 남자들과 몸을 섞었으며, 그 남자들과 자신은 연결되어 있다고 했다. 자신의 몸 속에 그들의 흔적이있고, 서로를 잊고 사는 것 같지만 그런 기억들이 그 사람들에게 더러운 기억이든, 행복한 기억이든 그런 기억들로 그 사람들은 살아가기 때문에 서로에게 서로가 일부가 된 것이라고 했다. 그리고 나도 그럴거라고 했다. 난 가슴 깊이 그 여자의 사랑을 이해했었다.
    택시 기사에게 사기도 당했지만 기분 나쁘지 않았다 택시기사를 이해했다. 죽을 뻔 한적도 있었지만, 즐거웠었다. 잊을 수 없는 공포를 선물한 그에게 감사했었다. 아무 생각 없이 거리를 걸으며 즐거움을 느끼기도 했다. 의미 없는 대화에 생기가 한껏 돌았고, 스무살 또래 남자놈들과 술에 취해 섹스와 세계 평화를 외쳤다. 이 모든 일이 나에게 의미 있는 일이라고 느껴졌다. 무슨 이유가 있거나, 배움이 있었기 때문이 아니라, 단지 즐겁고 통하였기 때문에. 어떻게? 내가 나를 잊었기 때문에. '어딘가에, 누군가의, 언제의 나'가 사라졌기 때문이었다. 

    타자가 된다는 것은, 일상의 무리 안에서도 그것이 일상이 되지 않는다는 것에 있다. 그것 또한 시간이 지나면 일상이 되어버리겠지만, 그렇지 않은 때 까지가 타자로 남아있는 상태이다. 장주가 나비로 되는 것, 나비가 또 장주가 되는 것, 이런 경계가 무너지며 흩어지는 것이 바로 타자가 되는 것과 다르지 않다. 이런 과정 안에서 우리는 새로운 느낌, 그런 좋은 느낌을 마구 마구 집어 삼킬 수 있는 새로운 그릇이 생기는 것이다. 이러한 여행적(?)삶의 지속이 곧 '도'가 아닐까 생각해본다. 결국 너와 내가 하나이고, 세상의 만물과 내가 다를 것이 없다는 것. 쓸모가 있기도 하고 없기도 하며 모든 것에 쓸모 있음을 이야기할 수 있는 것은 그것이 누군가에게, 혹은 무엇인가에 도움이 되어서가 아니라 즐거움 그 자체일 때만이 가능하다는 것이 아닐까. 그래도 역시, 난 원숭이다.

    소요유에선 내가 바로 매추라기가 되더니, 제물론에서는 장자가 나를 원숭이로 만들어준다. 사물의 양면을 동시에 보지 못함과, 궁극의 실재가 하나임을 모르는 원숭이. 매추라기가 곧 나요, 원숭이도 나요, 김지원이라는 이름의 사람도 곧 나이니 이 모두가 하나이고, 앞으로 장자를 읽어가며 또 내가 어떤 것으로 변할지 모르니, 이 세상이 곧 나인 것을 깨달아가는 과정이겠구나, 싶다. 핳핳