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 장자, 내편 - 소요유 <4> 구속이 없는 절대의 자유로운 경지에서 노니는 것 : 이정

Vol 1. 생각치 말자는 생각또한 말자 / 저항치 않고 뿌리내려진 / 사그라히 굳어버린 / 저, 시멘트 / 결코 우리와 다르지 않음을 / 잊지말자

Vol 2. 한숨에 오를수 있다하여 / 그곳이 한숨이더냐 / 조각조각난 생각에 틈속의 / 돌부리를 밟고가자

    시골이 생각난다. 내가 그토록 바라보던 그곳, 그리고 그곳에서의 생활 내가 꿈꾸던 그것은 장자의 소요유와 많이 닮아있었다. :천지본연의 모습을 따라 자연의 변화에 순응하여 무한의 세계에 노니는 자가 되면 대체 무엇을 의존할게 있으랴-중략

    그 무엇도 알지못한체 이땅에 뿌리내어져 그 무엇도 알지못한체 이땅을 떠나가는 우리네의 삶속에서 우리는 과연 어떠한 여정을 어떠한 이정표를 따라가야만 하는가? 나는 기본적으로 자연적인 삶의 흐름과 반대시 되는 사회적으로 습득하고 어쩔수없는 환경에 놓인 '나'의 삶에서 벗어나 생각해야만 하고 또한 그래야만이 진실로 합당한 생각에 도다를수있다고 믿었다. 그리고 시골에 내려가서 그토록 오랫동안 꿈꿔왔던 자유로운 생활과 다른이의 어떠한 영향과 구속없는 그곳에서 바람에 날리는 재와같이 끊임없이 떠다니는 '나'를 볼수있었고 치열하리만치 관찰했다. 그후 뭉게뭉게 내속에 피어오르던 "무엇이라 표명할수없는것"을 천천히 객관화 하는 과정을 갖게 되었다.

    바로 이 지점이다. 내가 소요유를 읽으며 공명하게된것은, "무엇이라 표명할수없는것" 즉 나에게는 내 삶의 이정표와 같은 그 무엇(이하생략)은 바로 소요유에 도달하기위한 통로와도 같은곳이었다. 그렇다면! 그 무엇을 통하여 우리는 소요유에 도달할수있는것일까? 그리고 왜 그 무엇을 통해야 하는것일까? 

    나는 그 답을 찾기위해선 인간의 존재를 상한에서 하한으로 볼것이 아니라 하한에서 상한으로 검증해봐야 한다고 생각 했다. 우선 나의 개인적인 특성 및 사회적인 환경을 모두 하얀색으로 덧칠하고 그저 생명으로써의 '나'의 존재만을 남겨놓는 것이다. 그리고 나의 감정으로 무엇이 옳고 그른지 또한 무엇을 할때 내 마음이 쾌락을 느끼고 감동하며 동요하는지 철저히 바라보는 것이다. 즉 일종의 짜여진 실험이라 할 수 있겠다.

    비로소 그 실험끝에 나는 장자가 말하는 소유요에 도달하기 위한 길을 발견할 수 있었다. 우선 첫째로 짚고 넘어가야할 사실은 사람도 생명이라는 사실이었다. 먹고 싸고 자는것부터 무의식, 내가 인지하지 못하는 미세한것들까지 이미 내 마음에 내 몸속에 생명의원리로서 시스템화 되어진 부분들이 있다는 것이었다. 사회적으로 통용되는 '본능'의 의미와 넓이보다도 훨씬 깊이 그리고 구석구석 살아있었다. 다만 흩뿌려진 장막위에 가려져 있었을뿐. 그래서 나는 내가 더 자유롭고 행복하기위해서는 이러한 생명의 원리에 주목해야 한다고 생각했고, 실험을 이어가며 내안의 소리에 귀 기울이고 또한 사회적으로 학습된 내가 아닌 그저 오롯히 존재하고 있던 나의 마음이 하라는 대로 했다. 자고 싶을때까지 자고 먹고싶을때까지 먹고 멍때리고 싶을떄까지 멍때렷으며 밤과 낮이 바뀌어도 그저 내 원하는대로의 자유를 만끽했다.

    그러자 놀라운일이 발생했다. 빼지도 더하지도 않았음에도 온몸을 휘감는 충만한 행복감이 하루,이틀이 아닌 한달여동안 지속되었던 것이었다. 객관적으로 시간이라는 구체적인 틀안에 시골 이전의 시간동안 극과극의 굴곡이 많은 인생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나에게 지속적인 행복감이란 길어봐야 일주일 남짓이었기에 이는 개인적으로도 충분히 혁명적인 결과였다.

    결국 나는 생명의 원리로으로 설계된 인간에게는 오감,육감 모두를 포함하고서 본능으로써 다가가야 최대한의 행복감과 자유로움을 맛볼수있다고 생각했고, 그속에서 절대적인 행복감에 휩싸일수있음을 판별해줄수있는 절대적인 선이있다고 믿게 되었다. 이제 그 다음 문제는 '돈' 먹고사는 문제였지만 그때 당시 물고기를 잡으며 자급자족했던 것을 떠올리면 충분히 평생 지속가능한 상황이었고 더불어 물고기를 잡아나의 생계를 꾸리는것이 '일'이 아닌 본능으로써의 '시스템'이라 생각하면 더더욱이 이세상의 문제랄것은 없으며 또한 그것이 곧 장자가 말한 소요유의 형태가 아니었을까 생각된다. 이제 그후의 것은 끊임없이 분열되는 세포처럼 끊임없이 팽창되는 우주와 더불어 무한한 가능성 및 더불어 그저 있는 그대로의 유동성과 유기체로서의 생명을 다하는 일이, 그리고 알수없는 모든 존재의 신비속에서 신나게 탐구하며 사색에 잠기는것이 아무것도 없이 태어나고 누구도 모를곳으로 떠나가는 인생에 대한 예의가 아닐까 생각된다. 

    인간이 설계한 사회적인 일은 두번째요 첫째는 모든 세상의 평등한 생명이였고 자신의 것이라 일컫어지는 몸뚱아리 안에서도 개별적인 운동성을 가지는 세포가 존재하는것처럼 결국은 지구속에 있는 개별적인 운동성을 가지는 인간의 존재 또한 그저 하나를 이루는 또한 무한한것들이 이루어져 하나를 이루는 존재가 아닐까? 즉 장자가 말했듯이 "천지 본연의 모습을 따라 자연의 변화에 순응하여 무한의 세계에 노니는 자가 되면 대체 무엇을 의조할게 있으랴"라는 소요유의 정신이 나에게는 시골에서 지냈던 나의 기억과 생각들로 공명했으며 더불어 옳고 그름의 시비판단이 아니라 차원을 넘어섬의 생각들, 한 단계 더 거시적으로 또한 입체적이며 동시에 미시적인 관점을 지닌 장자에게 큰 위안을 얻어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