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 장자, 내편 - 소요유 <3> 하상현

    일을 하던 도중에 사회복지 교수님의 논문을 도와 드리게 되었다. 지루한 타이핑이더라도 시급이 높으니 참아야지 하는 생각을 했었으나 정작 일을 하면서 내가 지금 직면하고 있는 이상과 현실에 관한 문제에 대해서 다시 생각해 볼 수 있는 계기가 되었다. Maslow라는 실존주의 심리학자의 글을 읽게 되었는데, Maslow에 따르면 인간의 동기는 결핍동기와 성장동기로 나눠진다고 한다. 나에게 있어서 결핍동기는 현실에서의 안정과 인정과 행복이라면, 성장동기는 그것들과는 별개로 존재하는 것처럼 느껴지는 삶에서 가치 있는 순간들을 만들어내고 싶은 마음이다. 난 이 두 가지가 심각하게 충돌하여 좌절한 상태에 있었던 것 같다. 나에게 있어서 미술은 일이 되어버렸고 잘해야 하는 것이 되어서 다가가기 조차 두려운 것이 되어버렸다. 22살이 있어야 하는 자리, 보여줘야 할 것들을 충족시키지 못함과 동시에 경제적인 환경적으로 압박 때문에 많이 지쳐있었다. 

    장자가 말하는 자유롭게 노니는 삶은 Maslow가 말하는 성장동기와 정상경험(무아경의 순간, 환희의 순간)과 비슷한 점이 많아 보인다. 나 또한 그런 경험들을 한 적이 있었고 많은 경우 자연과 연관이 되어있었다. 내 몸은 자연을 보고 느끼고 있었고, 정신은 여유로움과 환희를 느꼈었다. 정말 아무것도 할 수 없을 정도로 갑갑한 순간에 음악을 들으며 끊임 없이 마당을 돌다가 한 순간에 그 순간을 경험한 적도 있었다. 음이 말하는 바를 내 온몸을 통해서 느낄 수 있었고 수많은 별들과 보라색 노을, 커다란 나무들이 검은색 그림자로 보여졌었다. 이런 순간들로 삶을 가득 채우는 것 그것이 장자가 말하는 좋은 삶일 것이다. 그것은 사람들의 인정과 나 스스로의 욕심을 벗어나 생각할 수 있는 상태, 자의식을 극복한 상태 일 것이다.

    얼마 전에 나의 삶을 하나의 빌려진 삶으로 보는 것에 대해 생각해본 적이 있다. ‘나’를 너무도 ‘내 것’으로 보기 때문에 스스로를 벗어나지 못하고 지식과 돈과 명예에 대한 온갖 욕심 또 그것을 이루지 못하는 자신에 대한 자책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것이다. 내가 가진 모든 것은 사실상 대여하는 것이다. 집을 살 때 그것을 ‘구매’하여 ‘소유’한다고 하지만 실제로는 내가 죽기 전까지만 대여할 수 있는 것이다. 한 인간의 삶 또한 그렇게 본다면, 나의 삶에서 조금은 떨어져 나 스스로를 볼 수 있게 해주는 것 같다. 친구의 말을 빌려 쓰자면, 우리는 삶에서 하나의 배역을 받아 연극을 하고 있는 것이며, 그 연극을 만들어 가는 배우이다. 이렇게 인간의 삶을 무대라는 개념으로 봤을 때, 우리는 너무도 스스로에 역할에 밀착되어서 중요한 것들을 놓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나에게서 떨어져서 볼 때, 자의식에서 벗어날 때, 장자가 말하는 자유롭게 노니는 삶, 중요한 것들을 놓치지 않는 삶에 다가갈 수 있을 것이다.

    장자사상에서 주목이 된 것 중 하나는 ‘바람’이였다. 붕새의 초월적인 비상에 “바람이 충분하지 못하면 큰 날개를 띄울 힘이 없다.”라고 말하며 외부의 조건을 이야기 한 것인데, 이는 (내가 아직 충분히 이해하지 못하지만) 기독교에 ‘성령’이라는 개념과 비슷하다. 이는 신의 뜻이나 의지와 관련된 것인데, 이 신의 의지의 절대성과 인간의 자유의지 두 가지를 모두 긍정하는 하며 특정한(신비한) 방식으로 조화되는 것이다. 이러한 시선으로 볼 때 장자의 사상은 초월적인 존재인 인간과 더불어 자연이나 그 외부의 조건(초월적인 존재의 근원)이 만났을 때 초월하는 삶을 살 수 있음을 말하고 있는 것 같다.

    마지막으로 들었던 질문은 장자와 혜자의 공방으로 볼 때 혜자는 절대주의자로(큰 박을 물떠 먹는 용도로만 생각했기 때문에) 장자를 상대주의자로(모든 것이 보는 시각에 따라 다른 쓰임을 발견할 수 있을 것임으로) 볼 수 있는가 이다? 내 생각에는 혜자와 장자 모두 절대주의자이다. 혜자는 한 사물에 고정된 의미를 부여 했고, 장자는 변화할 수 있는 다각적인 측면의 의미를 부여했을 뿐, ‘가치, 의미’이라는 틀 안에서 그것을 보았기 때문에 두 사람 모두 절대주의자로 보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장자는 “자유의 네 단계”라는 글에서 특정 기준 안에서 가치 있는 삶의 단계가 매겨지는 것을 볼 때 어떻게 보면 상당히 분명한 가치의 기준이 있는 것 같다. 그 가치의 기준이 보통 사람들이 생각하는 이분법적이며 통념적이 아닌 것일 뿐, 그 높은 단계의 초월성을 향한 기준이 있어 보인다. 

    붕이라는 새가 날아가는 곳이 이상적인 상태와 세계인 ‘남쪽 깊은 바다’가 존재하는 것과, 매미, 새끼 비둘기와 붕새의 질적인 차이(크고 작음)를 비교하는 것, 자유의 네 단계를 분류하는 것, 사물의 ‘유용성’의 측면을 다방면적인 시각으로 보는 것(즉, 유용성이라는 것이 있다고 생각하는 것), 마지막으론 ‘손 트는데 바르는 약’이야기에서 사물이 더 값진 쓸모가 있다고 보는 점등이 그러하다.

    이로 볼 때 장자의 사상은 질서를 뛰어넘은, 혹은 질서를 파괴한 다양성이 아니라, ‘도’라는 초월적인 진실에 다가가기 위해 여러 가지 시선, 때로는 나 스스로도 인지하지 못하는 시선으로 세상을 바라볼 것을 요청하는 것 같다. 이것은 다양성안에서의(때로는 초월적인) 질서이지, 질서의 부재가 아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