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 장자, 내편 - 소요유 <2> 훨훨 날아 자유롭게 노닐다 : 김지원

1,2. 곤이라는 엄청나게 큰 물고기가 변하여 엄청나게 큰 새가 됩니다. 이 새는 엄청나게 큰 바람을 타고 저 머나먼 남쪽 천지로 가려합니다. 제해라는 사람은(혹은, 제해라는 책에 쓰여져 있기를) 붕이 하늘 위로 9만리 날아 엄청나게 큰 바람을 타고 남쪽으로 간다고 했답니다. 

소요유의 첫 번째 등장인물인 이 물고기는, 사실 엄청나게 큰 물고기 그 자체로서의 의미는 없어 보입니다. 중요한 것은 이 물고기가 화(변화)하여, 새가 된다는 것. 새가 되어야 저 머나먼 남쪽 바다로 향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붕이 날기 위해선 엄청난 파도, 엄청난 회오리바람이 필요합니다. 그런 것들이 갖추어진 후에야 붕은 남쪽으로 갈 수가 있습니다.

3. 우리가 보는 파아란 하늘은 과연 제 빛깔일까요? 붕이 하늘에서 우리 쪽을 봐도 그렇게 보이지 않을까요?
우리가 하늘을 파랗게 보는 것은 그것이 하늘의 제 빛깔이어서가 아니라, 아득히 멀기 때문입니다. 아득히 먼 하늘 위에 있는 붕의 눈에도 우리가 그 처럼 보일 것입니다. 우리가 소요유의 세상이 아득히 멀게 느껴지는 것 처럼, 소요유의 세상에서 본 우리의 세계 또한 아무 것도 아닌 듯 초연히 보일 것입니다(그 엄청난 거리). 

4. 큰 배는 큰 물 위에서만 뜰 수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큰 새인 붕 또한 큰 바람이 없이는 날아갈 수 없으며 그러한 조건이 갖추어진 뒤에야 비로소 남쪽을 향하게 됩니다.
아무리 경지에 오른 인간, 내공이 두터운 인간일지라도 사사로운 일들에서, 작고 작은 환경 속에서는 그 어떤 자유로운 일도 할 수 없습니다. 그것이 곧 날지 못하고 북쪽 바다에만 갇혀있는 곤의 모습일 것이며, 때를 놓치지 않고 날아오르는 것 또한 아주 중요한 일이라 할 수 있겠습니다.

5. 매미와 비둘기/ 명령과 대춘
우리, 사사로운 일들에 얽매여 사는 사람들은 그 아는바가 작고 옹졸함이 매미와 비둘기와 다르지 않습니다. 아는 만큼 보이고, 보는 만큼만 행할 수 있다고 함이 이와 같습니다. 교외 들판에 나가는 사람이 어찌 백 리 길 가는 사람의 맘을 알겠으며, 백 리 길 가는 사람이 어찌 천 리 길 가는 이의 마음을 이해하겠습니까. 또, 칠백년을 산 팽조가 천년을 사는 명령이라는 나무 앞에서 어찌 장수했다 할 것이며, 대춘 앞에서 명령이 어찌 오래 살았다 하겠습니까. 이는 더욱 작은이의 관점일 뿐이며, 여전히 글을 읽고 '아, 오래 사는 게 좋은 거군'하며 앉아있는 나를 보니 이리 슬플 수가 없습니다.

6,7. 은나라의 탕왕이 하극에게 물은바(<은나라 탕왕이 하극에게 묻다>라는 책에서 물은바), 메추라기가 붕을 비웃으며 '나는 한껏 뛰어올라도 기껏해야 이 숲에서 저 덤불로 가는데 쟤는 왜저러냐'했답니다. 그러므로 작고 옹졸하기만한 인간들이 딱 저 메추라기만한 놈들인 겁니다. 그 놈들을 송영자라는 분이 비웃었고, 열자라는 15일 동안이나 하늘을 날아다니는 분도 있었는데 이 분들도 쫌 모자란 부분이 있었답니다. 지인, 신인, 성인에 미치지 못한 겁니다.
메추라기와 같은 인간들, 벼슬자리 하나 채우기 급급하며, 더 큰 것을 바라보는 사람들을 비웃으며 '쟤는 왜저러냐'하는 인간들이 있습니다. 송나라의 평화주의자였던 송영자는 전쟁이 칭찬받기를 좋아하고, 비난받기를 싫어하는 욕구로 부터 시작된다고 주장하며 스스로 깨달은 자이지만 이러한 사람 또한 여전히 칭찬과 비난을 분별하는 인간이기에 아직 부족합니다. 열자는 세상사에 초연하고, 자유자재로 바람을 타고 노닐지만, 15일이 지난 후에 세상으로 돌아왔습니다. 여전히 바람에 '기대지' 않으면 안되므로. 그리고 마지막으로 '대붕', 지인, 신인, 성인의 경지. 어떤 것에도 기대지 않고 자유롭게 노니는 그 경지가 바로 소요유의 세상인 것입니다.

8. 요임금이 허유에게 자리를 넘겨주려 하자, 허유는 자리를 마다했습니다. 뱁새나 두더지처럼 주어진 것에 만족하며 살겠다는 것. 
이야기는 유가에서 하늘처럼 떠 받드는 요임금을 허유만도 못한 사람으로 만들며, 허유도 그닥 대단치 않은 사람임을 시사합니다. 요임금은 자신이 쌓은 공을 허유에게 주려했다는 점에서 공으로 부터 자유로운 듯 하지만, 자신이 한 일을 알리려 했다는 점에서 명예를 잊지 못하였고, 허유는 명예를 잊은 듯 하지만, 자신의 안위에 집착하는 모습을 보여주었습니다.

9,10. 견오가 연숙에게 접여에게 들은 이야기를 해주었습니다. '멀리 고야산에 신인이 살았는데, 그 이야기를 들으니 허황되고 미친 놈인 줄 알았다'고. 연숙은 '니가 귀 먹고 눈 멀은 놈이구나'했습니다(신인). 신인은 공이나 명예로부터, 세속적인 모든 가치로 부터 자유로워진 사람들입니다. 그렇다고 이 사람들이 세상사와 무관한 것은 아닙니다. 이 사람들의 존재 자체가 세상을 변화시킬 수 있는 가능성이며, 이롭게 하는 힘인 것입니다. 

11. 모자장수와 요임금
조금 과장하여 해석해 보자면, 요임금은 곤이 붕이되는 것과 같은 변화의 과정에 서있던 것이 아니었을까, 하고 생각해봅니다. 고야산의 신인들을 만나고, 멍해지는 것. 이는 회오리 바람에 서 있는 붕의 모습?!

12,13,14. 혜자와 장자
혜자는 아마도, 붕이니, 신인이니, 바람을 타느니 어쩌느니 하는 장자의 이야기가 허황되게 들리어, 모든 물건에는 쓸모가 있다는 본질론적 견해로 반박합니다. 하지만 장자 역시 '비본질론적 견해'로서, 모든 사물에 쓸모가 정해져 있다는 것이 어리석은 생각이며, 사물들은 때때로 쓸모가 있기도 하고 없기도 하다고 말합니다. 또한 우리 머릿속에 이미 정해 놓은 '쓸모'로 사물을 보는 것이 아니라 사물 자체에서 쓸모를 찾아 내어야 한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메추라기가 붕이 되기 까지는 도데체 어떤 과정이 필요한 것일까. 메추라기인 나로서는, 굳이 그렇게 살아야하나 싶다. 그런데 궁금하긴 하다. 어떻게 해야하고 뭐가 좋은지. 무엇보다, 글이 너무 좋다. 이곳 저곳을 넘나들며 펼쳐지는 너무나 큰 스케일의 글에 절로 감탄사가 나온다. 좋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