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 장자, 내편 - 소요유 <1> 김범석

    인도의 거리는 어지러웠다. 수많은 오토바이에선 시커먼 연기가 뿜어져 나왔고, 비명을 지르는 듯한 경적소리는 거리를 메웠다. 사람들은 거의 부닥치다시피 오토바이 사이를 비집고 다녔고, 주먹만 한 눈을 껌뻑거리는 소는 길다란 꼬리로 엉덩이를 채찍질하며 어슬렁거렸다. 나는 그 속에 있자하니 머리가 지끈거리고 숨을 쉴 수가 없어, 입으로 들이마시면 목이 따갑고, 코로 들이마시면, 두어 번 숨을 더 쉬었다간 콧구멍이 먼지로 막힐 것 같았다. 숨도 못 쉬겠는데, 아랑곳 않고, 내 팔목을 잡아끌며 자기에게 돈을 좀 내놓으라는 인도인들이 어찌나 밉던지, 이게 지옥인가 싶었다. 그렇게 휘둘리던 날들이 지나고, 머지않아 나는 무섭게 적응했다. 생각해보니 이 사람들이 이상한 게 아니었고, 그 누구하나 사실은 이상한 것들이 없었다. 죽을만한 상황도, 사실은 나에게만 해당되는 일이었다. 팔목을 이끄는 인도인들에게 짜증을 느끼는 건 나였고, 사실 내가 갈 길을 오롯이 간다면, 그들도 나를 완전히 막지는 않았다. 중요한건 나였다. 내가 지금, 어디로 가고 있는가, 무엇을 보고자 하는가. 어디에 있는 것인가. 이 모든 현실적인 나의 상황을 충분히 받아들였다면, 나는 그 무엇도 이상하게 여길 필요 없었고, 그 수많은 차이들에 대하여 의미를 찾아낼 수도 있었다. 충분히.
    하물며 인도의 거리만이 그럴까? 모든 게 그렇다. 대학만 하더라도. “형, 그 수업 어때요? 학점 잘 주는 교수님이에요?” 이런 바보 같은 질문이 많다. 학점 받아서 뭐 하려고. 취직 잘 해서 뭐하려고, 그게 문제의 본질인가. 네가 이곳에 왜 왔고, 대학은 본질상 무엇을 하는 곳이며, 본질을 떠나서 이곳에 온 자기 자신에게 갖는 의미는 과연 무엇이던가. 생각해본 적 있는가. 이러한 구구절절한 이야기를 설명하기 귀찮은 나는 이렇게 말 한다. “네가 좋아하는 과목을 들어. 그럼 학점도 잘 나오겠지.” 그리곤 생각한다. ‘학점’에 휘둘릴게 아니라 ‘참 나’가 곧바르게 나아가서 원하는 길에 이르는 게 먼저지.

    잡설이 길었다. 결국 군더더기를 없애고 간단하게 요약할 수 있다. 상대적인 것을 인식할 것, 상대적인 행복을 인식할 것. 그리고 절대적인 것, 절대적인 행복, ‘참 나’를 깨닫고 곧바르게 나아갈 것. 장자에는 왜 초두부터 말도 안 되는 곤과 붕이 나왔나. 크기가 수 천리나 되는 곤, 구만리를 날아다니는 붕, 재미있지 않은가. 혹시 모른다. 인간이 가보지 못한 수 천리 해저에 곤 한 마리쯤 헤엄치고 있을지도. 뭐 어쨌든, 이런 거대하게 자기 갈 길 가는 애들에게 매미와 비둘기, 메추라기께서 비웃음을 드린다. 나무 한 번 오르기도 벅찬데, 그렇게 높이 가서 뭘 하겠느냐고. 물론 붕에게까지 그 소리가 들렸을 리 만무하다. 
    이쯤 가면 요임금과 허유 사이의 일은 그럭저럭 이해가 된다. 요임금은 허유를 찾아와 왕권을 위탁하는데, 허유는 더러운 소리를 들었다며, 강물로 뛰어들어 자기 귀를 깨끗하게 씻어내었다고 한다. 세상을 다 준다고 했거늘, 그럼 쥐 오줌같이 흐르던 강물도 배가 다니는 대 운하로 만들 수 있는데, 대체 왜 허유는 거절을 했는가. “뱁새가 숲 속에 둥지를 짓는다 해도 불과 나뭇가지 하나면 족하고, 두더지가 강물을 마신다 해도 그 작은 배를 채우는 데 불과하오. 나도 그런 경지를 즐기고 있으니, 자, 그대는 돌아가 쉬시오. 내게는 천하란 아무 소용도 없소.” 장자 입장에선, 이거 상상만 해도 얼마나 가슴 떨리는 일이겠는가? 물론 하나로 통하는 두 가지 이유에서다. 첫째로, 당대는 극악한 춘추전국시대. 춘추에 전쟁으로 얼룩진 국가들의 시대라는 것인데, 그 시대엔 사람이 서로 죽여서 끔찍한 나날들이었고, 공자의 인의는 씨알도 안 먹혔다. 그래서 장자는 인위를 버리고 자연으로 돌아가자고 하였던 것. 그렇게 자연을 찾아 숨어들어갔건만, 권세를 가진 임금이 직접 찾아와 인위의 소굴로 끌어들이려 하니 얼마나 가슴 떨렸을까? 둘째로, 그 제안을 거절하고, 떨린 가슴을 내려놓아, 다시 자신의 초가집에서 산 공기 마시면서, 느긋이 낮잠 자고 소소히 밥 지어 먹는 게, 또한 얼마나 가슴 떨리는 일이었겠나 싶다. 다시 자연으로 돌아왔으니. 
그럼 우리는 장자가 혜자에게 한 말들도 쉬이 이해할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혜자는 말한다. 장자의 사상은 크고 울퉁불퉁하며, 비비꼬여 써먹을 수가 없어, 목수조차 지나치는 나무라고. 장자는 말한다. 큰 나무는 무하유의 넓은 들판에 심어, 그 곁에 한가로이 쉬면서, 그늘에 누워 자면 그만이라고. 
    ‘만약 천지 본연의 모습을 따르고 자연의 변화에 순응하여 무한의 세계에 노니는 자가 되면 대체 무엇을 의존할 게 있으랴. 그래서 지인에게는 사심이 없고, 신인에게는 공적이 없으며, 성인에게는 명예가 없다.’ 뭐, 결론은 이미 장자가 말을 해준다. 여기에 내가 덧붙일 결론이라고 해봐야 무에 그리 중요할까. 지인이고, 신인이고, 성인이고, 나도 안다. 지금 당장 내가 이런 산신령의 경지에 미치지는 못할 거라는 거. 그래도 조금은 알 것 같다. 장자라는 성인이 무얼 그리는지. 
    절대적인 경지에서 노닐라는 것 아니겠나 싶다. 내 식으로 해석하면 이렇다. ‘참 나’가 움직이는 방향으로, 사욕을 내려놓고 곧바르게 움직이는 것 아니겠나. 인도인들이 매연을 뿜어내고, 내 앞길을 막아도, 조급해하지 말고, 내가 지금 그 상황에 놓여있다는 사실 자체로 순수하게 받아들이고, 학점이 먼저가 아니라, 지금 내가 누구와 함께 무엇을 공부하고자 하려는 게 먼저 아니겠나. 요임금에게 왕좌를 얻는 게 중요한 게 아니라, 허유가 산으로 숨어들어간 이유가 먼저일 테고, 그 이유에 따라 ‘참 허유’대로 움직인 건 너무도 당연한 일 아니었겠나. 그렇게 자기대로 살아감에, 혜자의 큰 나무가 뻗은 대로 곧게 서서 장자의 그늘막이 되어주면, 그래서 낮잠 한 번 늘어지게 자면 그 뿐 아니겠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