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8-1. 놀이와 삶의 경계 지우기 (윤율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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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한민국의 끔찍한 입시지옥을 겪어 사회로 나온 사람이라면, 누구나 “놀 땐 놀고 공부할 땐 공부하라”는 조언 아닌 조언을 귀가 닳도록 들어왔을 법 하다. 물론 혹자가 이러한 훈계를 던지는 상황은 오로지 우리가 공부에 충실하지 않았을 때라는 점에서 이건 꽤나 비겁한 훈수이지만, 어쨌거나 이 문장이 지시하는 바 자체는 상당히 그럴싸해서 반박할만한 허점을 쉽게 드러내지 않는다. 이와 맞물려 반드시 나오게 되는 충고가 하나 더 있다. “잘 노는 애들이 공부도 잘 한다더라”, 혹은 반대로 “공부 잘하는 애가 노는 것도 잘 한다” 따위의 이야기들이다. 상식적으로 공부를 잘하면 ‘찌질이’이고 잘 놀면 ‘꼴통’인게 3류 학원물에서도 변하지 않는 냉정한 현실일진데, 도대체 이게 말이나 되는 얘긴가? 그러나 어설픈 항변은 차라리 없느니만 못하다. 어줍잖게 대들다가는 결국 “그러니까 네가 제대로 놀지도 못하고 공부도 못하지”라는 공허한 메아리만이 돌아올 뿐이다. 이쯤 되면 그냥 손사래를 치며 자리를 뜨거나, 적당히 진지한 표정으로 책을 꺼내드는게 최선의 방법이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1.

    결론적으로 전자─“놀 땐 놀고 공부할 땐 공부하라”─는 틀리고 후자─“잘 노는 애들이 공부도 잘 한다”─는 맞다. ‘놀 때’와 ‘공부할 때’를 이분법적으로 양분하는 순간 이미 공부는 스트레스가 되고 놀이는 단지 스트레스에서 벗어나기 위한 일탈이 된다. 때문에 이러한 방식으로는 공부와 놀이 어느 것 하나도 즐거울 수 없다. 공부는 힘들고 지루하고 막막하며, 놀이는 ‘꼰대’들의 눈치를 봐야하는 떳떳치 못한 행위로 규정되는 것이다. 그렇다면 아이러니하게도─비록 논리의 출발점은 전혀 다르지만─ 같은 연장선상에서 대부분의 우리가 멋있게 놀지도 치열하게 공부하지도 못했다는 지적은 어느 정도 들어맞는 얘기다. 물론 이것은 꼭 학생들에게만 적용되는 문제는 아닌 것 같다. 많은 경우 ‘공부 : 놀이’의 관계와 ‘일 : 놀이’의 관계는 크게 다르지 않은 대응으로 간주되기에, 부모의 눈치를 보며 컴퓨터 앞에 앉고 오토바이를 탔던 아이들처럼 수많은 부모들 역시 갑갑한 넥타이를 풀어 이마에 동여맨 채 똑같은 딜레마와 씨름했으리라. 그리고 자라나 어른이 된 아이들은 다시 똑같은 이분법의 폭력 속에 놓여져 모순적인 악순환을 되풀이하고 만다.


    2.

    잠시 조금 먼 옛날의 이야기로 돌아가 보자. 놀이의 기원을 찾는 연구는 다양한 학문적 분야에서 주목할 만한 성과를 거두었다. 학자들에 따라 놀이는 최초의 원시적인 공동체 활동으로 평가되거나 심지어 예술의 기원으로 추정되기도 한다. 특히 뒤르켐은 「종교생활의 원초형태」를 통해 놀이가 가진 주술성과 토테미즘을 정밀하게 분석하는데, 이러한 연구들은 분명한 한 가지의 공통점을 명시하고 있다. 바로 놀이가 삶 자체와 밀접한 연관성을 가지고 있었다는 점이다. 비등한 예로 우리네 선조들이 즐겼던 여러 가지 놀이들을 꼽아 볼 수 있다. ‘~놀이’라는 이름으로 지칭되는 대부분의 풍속들─대표적으로 굿놀이, 쥐불놀이, 거북놀이 등─은 명백히 삶의 범주에 속한 무엇이거나 동전의 양면처럼 노동과 여흥, 신성함과 속됨 사이에서 미묘한 등위를 형성해 왔다. 요컨대 놀이는 하나의 이음새다. 놀이가 총체적 삶을 이루는 일상의 조각들을 효과적으로 연결함으로써 인간의 삶은 유기적으로 구성되고, 더 나아가 사회 전반이 더욱 건강하고 창조적인 생명력을 뿜어낼 수 있었던 것이다. 놀이가 역사적으로 담당해 온 이러한 기능은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중대한 시사점을 던져준다. 오늘날 놀이가 의미하는 바는 무엇인가? 우리는 어째서 노는가?


    3.

    놀이가 변천해 온 과정을 역으로 추적해 볼 때 산업화는 중대한 사건이다. 산업혁명을 통해 분업의 개념이 생기고 본격적인 자본주의 사회가 도래하며 결과적으로 인간의 부품화가 빠르게 진행되었다. 물론 인간이 살아가는 모든 방식에는 기본적인 분절성이 전제된다. 또한 산업혁명으로 인해 놀라운 문명의 진보가 이루어졌음을 상기할 때, 자본주의 시장경제에 대한 분별없는 비판은 자칫 유행에 편승한 무책임한 태도가 될 것이다. 그러나 실체가 불분명한 소비 주체로서 인간의 본질 자체가 단지 ‘부분’으로 환원되고 마는 극단적인 상황은 분명 여러 가지 층차의 문제를 야기시키고 있다. 인간, 노동, 삶 전반 따위가 변화하며 이들의 교각 역할을 하던 놀이 역시 필연적인 변화를 거친다. 현대 사회의 놀이는 앞서 언급한 것처럼 다만 고된 일이나 부조리에 대한 ‘분노’를 푸는 행위로 정의되고 있다. 때문에 그것이 반사회적이고 자극적일 수록 재미있는 놀이로 인식되는 경향마저 띈다. 쉽게 말하자면 현대인들의 놀이는 아무런 목적도 없이 괴리되어 있다. 며칠 전에는 영국에서 유행하는 ‘행인 폭행놀이’로 또 한 명의 중년남성이 숨졌다는 기사가 한 인터넷 대형 포털에 올라 화제가 되었다. 이 놀이를 함께 즐겼던 10대들은 “우리가 이 정도는 되는 놈들이야, 더 이상 쓸데없이 구속하지 마!”라고 과시한 끝에 몸이 한껏 달아올라 충만했을까? 친구와 ‘목조르기 놀이’를 하다 숨진 초등학생의 뉴스거리를 곱씹었며 잘못된 놀이 문화를 성토했을 기성세대는, 아마 같은 시각 바에서 어린 아르바이트생의 엉덩이나 만지며 지분거리고 있었을 텐데. 


    4.

    무엇이 어쨌건 간에 놀이는 즐거워야 한다. 엄숙하고 고상한 놀이만을 즐기자는 얘기도 아니고, 우표 수집이나 명상 따위를 모두에게 권하려는 것도 아니다. 그러나 놀이는 작은 부분인 동시에 큰 전체여야 한다. 놀이는 조각난 일상과 일상의 이음새가 되어 삶의 한 축을 채우는 즐거움이기 때문이다. 인간의 행위와 놀이는 언제나 상보적 관계에 놓여있다. 그렇다면 비록 작금의 모든 놀이 문화가 잘못되었다고 섣불리 단언하기는 어렵더라도, 후기 산업 사회의 파편성 위에서 놀이가 가질 수밖에 없는 한계는 명백할 것이다. 결국 ‘나는 왜 노는가?’라는 질문은 ‘나는 왜 사유하고 행동하는가?’라는 더욱 무거운 물음이 되어 돌아온다. 저명한 역사학자인 호이징가는 인간을 놀이하는 존재─homo ludens─로 규정한 바 있다. 물론 인간의 특수한 본성을 하나의 개념으로 설명하기 위해서는 매우 신중한 접근이 요구될 테지만, 단순한 재충전을 위한 여가가 아닌 삶을 새롭게 창조하기 위한 동력으로서, 놀이의 가치는 끊임없이 재고되고 반성되어야 한다. 이것이 우리가 놀이와 삶의 피상적 이분법을 지워내야 하는 가장 큰 이유다. 그리고 이러한 ‘놀이의 일상화’는 오로지 정교하고 올바른 세계 인식을 통해서만 가능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