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4-1. '입는 쇼' 기획안 (윤율리)

  0.

    많은 명사들은 그에 당연히 뒤따라야만 하는 동사들의 의미를 폭넓게 내포한다. 그러나 단순히 언어생활의 관성에서 비롯된 이런 습관들은 때로 적잖은 혼동을 야기 시키기도 한다. 가령 거리에 디스플레이 된 옷을 소비하는 인간의 욕망은 <옷>과 <입다> 중 정확히 어느 쪽에 맞닿아 있는가. 보통의 경우 이 둘은 명확한 구분을 요구받지 않기에, 사물은 그것이 일상적일 수록 자의적인 의지에 따라 왜곡되고 갈라져 마침내 본연의 냄새를 잃고 만다. 입는다는 선명한 행위와 분리되었을 때 옷은 우리에게 전혀 다른 의미이거나 심지어 아무런 의미조차 아닐 수 있다. 여기에서 주목하는 것은 사물보다는 그 위에 덧씌워진 행위의 아우라다. <입다>와 구별된 순수한 <옷>을 상상하는 것이 완전히 불가능하지는 않지만, 보편적인 삶 속에서 옷은 어디까지나 입기 위한 대상으로서 더욱 가치 있게 존재하기 때문이다. 이 기획은 옷 자체가 가진 물성과 <입다>에서 파생되는 욕망을 분리함으로써 사물을 비트는 인간의 무의식적인 의지들을 객관적으로 관찰하기 위한 시도이다.


  1.

    <입는 쇼>의 세부적인 구성은 일반적인 패션쇼와 크게 다르지 않다. 무대는 U자 형의 런웨이로 이루어지고 약간의 거리를 두어 관람을 위한 공간을 만든다. 다만 지나치게 친숙한 느낌을 주었을 때 효과가 반감될 수 있으므로 무대와 관람석의 밝기 대비를 강하게 한다. 조명은 전체적으로 다소 어둡게 하되 형광등을 연상시키지 않도록 유색 등을 쓰는 것이 좋다. <입다>는 일차적으로 욕망으로 환원되는 만큼 적당한 채도의 붉은 색조가 적당하리라 생각된다. 모델은 기본적인 속옷만 입은 상태에서 지정된 디자이너의 옷을 가지고 나와 무대에 오른다. 내의를 미리 착용하는 것은 이것이 사물 자체로부터 발생한 지극히 실용적인 이유로 사용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만약 속옷을 걸치지 않은 경우 관객들에게 불쾌감을 줄 수 있고 의도하지 않은 선정성으로 인해 원래의 취지가 훼손될 위험이 있다. 그러나 물성 이상의 의미가 개입할 여지를 최소화하기 위해, 속옷은 다른 무늬나 색이 없는 것으로 독특하지 않은 모양을 고른다.
    워킹이 시작되면 리허설에서 측정했던 적당한 속도로 옷을 입는다. 이때 동작은 자신 있고 커야하지만 이따금씩 잠시 걸음을 멈추며 옷에 대해 머뭇거리는 애드리브를 섞어준다. 옷을 다 입어야 하는 시점은 무대를 돌아 다시 들어오는 약 3/4쯤의 지점이다. 모델들은 이 곳에서 최종적으로 신발을 신고 제자리에서 한 바퀴 돌아 앞뒤의 모습을 보인 뒤 퇴장한다. 옷을 철저히 ‘입는’ 일련의 과정들은 관객들로 하여금 자연스레 <옷>과 <입다>의 분절을 유도시킨다. 옷은 <옷>인가 <입다>인가? 옷이 더 이상 <옷>일 수 없다면 일상적인 욕망의 경계점은 어디인가? 사물과 행위의 연결고리가 끊어지는 순간은 적나라하다. 그리고 비로소 현상의 깊숙한 곳에 감추어졌던 의지들의 정체가 드러난다.


  2.

    비슷한 다른 기획들이 <입는 쇼>에서 파생될 수 있다. 사회적인 관습이나 가치관이 마치 옷처럼 사람을 ‘덮어’버리는 것에 착안한다면 <입히는 쇼>가 가능하다. 이것이 <입는 쇼>와 다른 점은 모델이 입을 옷을 즉석에서 무작위로 집게 하거나 관객이 마음대로 직접 옷을 입히는 형태로 진행된다는 것이다. <입는 쇼>든 <입히는 쇼>든 역설의 반전을 극대화하기 위해, 고려해야 하는 몇 가지 요소를 제외하고는 패션쇼와 최대한 동일한 소스를 사용해 보는 안도 재미있다.
    엄정한 의미에서 <입히는 쇼>는 거대한 폭력이다. 만약 모델 스스로 옷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면 차라리 다시 벗어서 집어 던져버리게 하는 건 어떨까. 물론 어떤 옷이 입혀지더라도 인형처럼 웃어버리고 마는 우리 주위의 혹자들 역시, 모델 중의 누군가는 연기해야만 할 부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