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1-3. 무제 (정지윤)

>  B : 많은 얘기들을 했지만 정작 인간은 왜 소통하려 하는지 묻지 못했다.
>  C : 외로운 존재로서 자신 바깥의 존재로부터 이해받고 싶은 마음 아닐까.
>  H : 오히려 자기 스스로를 이해시키려는 노력일 수도 있다.
>  A : 두가지가 어쩌면 같은 이야기 일지도.
>  F : 뭔가를 이야기 할 때 내가 이미 답을 알고있는 경우가 많다. 비슷한 느낌이다.

여기를 보는데,
느닷없이 내 친구가 자기 일기에 썼던 글이 떠올랐다


'타인' 없이 살아가는 너에게.

제일 저주스러운 막말을 생각해냈다.
너가 그렇게 꿈꾸는 사랑(이라고 착각하는 연애)은 너에게 찾아오지 않을 것이다
어쩌면 사랑이라고 생각하겠지.
지금까지의 너와 마찬가지로 그 사랑은 한심스럽게도 끝끝내 너를 사랑하는 것에 지나지 않을 껄.
타인에 대한 고려 없이 '사랑'이라고 불리는 모든 것은 불가능해.
끝까지 너의 사랑을 '사랑'이라고 믿는다면 
결국엔 너와 마주하는 사람이 고통에 찌들거나 
너는 사랑을 할 수 없다는 자괴감에 쪼그라들고 말꺼야.
제일 무서운 저주같은데, 너는 무섭지도 않으려나.
(후략..저작권은 내친구 됒이에게..)

첫시간에 준혁이 운을 떼었듯이  대화는 청자(타인)가 설정되어있어야한다. 그리고 소통의 목적은 그에게 다리를 놓기 위한 것이어야한다고, 나는 생각한다.

영화 존 말코비치 되기 에서는 말코비치 뇌 속으로 들어가는 문이 등장한다. 막상 말코비치 자신이 그 문 속으로 들어갔을 때 그는 끔찍한 광경을 본다. 모든 사람들이 말코비치의 얼굴을 하고 '말코비치 말코비치'를 반복하며 대화한다. 제작자 의도가 어땠는지 모르겠다만.. 내가 느끼기엔 말코비치로 표상된 인간 일반은, 결국 뇌 속에 자기밖에 없다는거라고 느껴졌다. 모든 이야기들이 결국 홀로된 murmuring일 뿐, 타인도 타인과의 이야기도 -있는듯 하지만-사실은 없다. 

여기에서 '타인'의 의미에 대해서 돌아보자. 

요새 나의 고민은, 내 삶에서 타인이 없다는 것에 있다. 타인이 있다고 착각할 때가, 있긴 했다. 이우학교에서 농촌봉사활동에 갔을때 나는 그런 착각 속에 있었다. 대학에와서 농활을 떠날 때도 나는 농촌'봉사'활동을 가려 했다. 그런데 농활은 '농민 학생 연대활동'의 준말이었다. 복탄리에서 농사일을 돕는 것이 '봉사'에 지나지 않는 다는 것을 나는 잘 이해하지 못했다. 그리고 봉사 라는 이름이 얼마나 나를 편안하게 만들어주었는지를 그 때는 잘 몰랐다. 하지만  그 안에 '연대'라는 단어를 품음으로서 농활은 지독해졌다. 그 단어는, 타인의 삶과 내 삶을 겹쳐야 한다고 말하고 있었다. 나는 부단히도 그러려 노력했다고- 스스로 생각했건만 여전히 내 삶안에 '타인'의 삶은 없다. 계급을 넘어, 성별을 넘어, 학벌을 넘어선- 담장 밖의 사람이 내게는 없다. 내 자신에게 가혹하게 말하자면, 스스로 그들 삶과 내 삶을 같은 방향으로 가도록 두고싶지도 않다. 슬픈게지.  

나는 본원적으로 외롭다. 근데 그 공허함에 대하여 나는, 연애가 그 공간을 채워줄 수 있을거라 생각하거나, 나와 비슷한 친구들이 채워줄 수 있을거라 생각했다. 나와 비슷한 친구들의 범위는 이 글을 읽고 어느정도 수긍할 수 있는 너희다. 근데 나는, 너희와 연인을 타인이라고 부르기엔 조금 무리가 있다고 여겨진다. 우린 근본적으로 비슷하니까. 삶을 같이하기엔 더없이 편안하니까 말이다. 뭐 다시 말하자면 '봉사를 함께하는 사람'이지, '봉사의 대상자'로 분류되었던 이들은 아니잖아. 결국 타인은 없고, 나는 홀로 남았다.

소통은(첫 날 대화에서 소통과 대화의 차이?에 대해 뭔가 열심히 이야기했던 것 같지만 잘 기억이 안난다. 그냥 우리가 일상적으로 쓰는 '대화'와 구분없이 읽어주었으면 싶다) 타인의 삶과 나의 삶 사이에 다리를 놓는 것이고, 담장을 낮추는(없애는) 것이다. 힘들고 더러운 일이 아닐 수 없다. 가진것을 내려놓고 잘나가는듯 보이는 것을 내려놓아야 할 수 있는 일이니. 물론 너와 나는 젊고 기민하다. 그래서 '소통하는 척'할 수 있고, 그것이 '잘나가는 것처럼' 보일 수도 있다. 나는 그걸 겉멋이라고 부른다. 겉멋에서 가까스로 탈출한 나로서는, 내가 나무토막처럼 느껴진다. 나무인 줄 알았던, 나무토막. 그래서 이렇게 무기력한가보다. 

뒤에 이야기가 어떻게 진행됐는지는 잘 모르겠는데, 내게 대화-소통은 이런 꼴을 가지고 있다.  다시 친구의 일기를 보겠다.


...어쩌면 사랑이라고 생각하겠지.
지금까지의 너와 마찬가지로 그 사랑은 한심스럽게도 끝끝내 너를 사랑하는 것에 지나지 않을 껄. 
타인에 대한 고려 없이 '사랑'이라고 불리는 모든 것은 불가능해.


소통 없이 사랑이라 불리는 모든 것은 불가능 하다. 적어도 나의 외로움은, 내 삶에 타인을 둠으로써 해소될 수 있는 종류의 것이라고 본다. 그 것을 내 생에서 달성하지 못한다면 나는 주구장창 나무토막으로 살다 갈 것같다, 고 단정적으로 말해본다. 난 이런식의 말을 꺼리는 사람이었는데 언제부턴가 염세적으로 툭툭 뱉곤한다. 흑백의 이분법도 피할 수 있는 만큼 피하고 싶었고, 딱딱하게 말하는 것도 솔직히 꼬질꼬질해 보여서 싫었는데- 이렇게 하지 않으면 내가 얼마나 편안하게 겉멋에 젖어있을 수 있는가를 나는 알고있다. 꺄하.

나무토막이다보니, 나는 언어장애를 앓고있다. 
이 글들이 보는 이로하여금 얼마나 가 닿을지는 모르겠다만
결론적으로 하고싶었던 말은, 딱 하나인 것 같다. 

이젠 murmuring을 그치고 사랑하고싶다. 생활하고 싶다
라고 누가 그랬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