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1-1. 대화의 겉과 속 (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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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화의 양상 분석


  아아, 이 밤이여. 댄나리 짱구를 굴려도 도통 글이 써지질 않는구나. 어쩌자고 이 바쁜 시기에 세미나까지 하겠다고 말을 한 것일까. 후회가 밀려온다.
그러나 모임의 기본은 역시 자기 역할에 책임을 지는 거지. 그리고 커뮤니티 봄에서 맡은 역할이란, 끊임없이 지껄이거나 내가 할 수 있는 유일한 재주인 끊임없이 뭔가를 써내려가는 것 둘 중 하나일 테다. 심지어는 변명을 할 때조차도 유일한 도구는 나불거리는 혓바닥이 전부가 아니던가. 그때는 머리보다 입이 앞서는 순간이다.
  뭐 어쨌든. 내가 하려는 이야기는 간단하다. 대충 인간들이 흔히 톡킹이란 걸 할 때 어떤 일이 일어나는가, 그 층위를 두 개로 나누어서 설명해보려는 시도가 될 텐데... 소위 고전적인 이원론적 접근과도 사실 그 맥을 같이 한다. 꽤나 고루한 이야기일 수도 있겠지만 나름대로는 괜찮은 아이디어라고 생각하고 쓴 것이니 부디 잘 들어주시길.

<그림1 참조>

  당신이 지금 보고 있는 것은 포켓볼이 아니다. 포켓몬스터에 나오는 그거. 그럼 뭔가.
  모든 대화는, 정확히 말하면 인간 대 인간 내지는 소통 가능한 두 대상 사이의 상호작용은 언어를 통해 이루어진다. 그게 뭐 정교한 체계를 가진 인간의 말이든, 동물이 내지르는 종류의 어떤 울음소리이든(인간도 가끔, 아니 꽤 자주 사용한다), 제스처나 문자를 이용한 것이든 우리 감관을 이용해서 파악할 수 있는 수단을 경유하지 않고서는 소통이 잘 되지 않는다. 
  나는 감관 없이 소통이 안 되는 것이 아니라 잘 되지 않는다고 말했다. 감관 없이 소통이 가능한가? 나는 이 자리에서 감관을 이용한, 좀 쉽게 말해 언어를 통한 소통과 언어 없는 소통을 비교해서 살펴보고 싶다. 위의 그림에서 ‘겉’이라고 쓰여진 것은 감관을 이용해서 포착가능한 대화의 부분이고, ‘속’이라고 쓰인 것은 그렇지 않은 어떤 것을 의미한다. 내가 그렇지 않은 ‘어떤 것’이라고 표현한 까닭은 그것을 정의할 수 있는 적절한 말을 찾아내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아마 내 생각에, 찾을 수 없을 것 같다. 

  좀 구체적으로 들어가 볼까.
  우리가 말을 할 때를 한 번 생각해보자.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대충 골라보면.

① 이 옷 포장해주세요.
② 밥 먹었냐?
③ 내 말은, 그때 니가 좀 그렇지 않았냐구.

  ①은, 보통 상점에 가면 나누는 말. 화자가 지칭하는 대상에 대한 목적적인 행위를 요구하는 것 이하도 이상도 아니다. 물론 그 이면에 다른 속뜻이 전혀 없다고 할 순 없겠지만, 여기서는 화자가 상대방(그게 남성이든 여성이든, 그러니까 이성이든 동성이든)을 후리는 데 능숙한 재주가 있거나 어떤 음모를 가지고 그 사람에게 접근한 특수한 경우가 아니라고 가정하자. 솔직히 그럴 일 별로 없잖아? 나만 그런건 아니라고 말해줘, 캭.
  각설하고, ①의 말을 주고받는 대화에서는 표면적으로 드러나는 것이 대화의 전부이다. 대화의 표층만 존재하는 경우이다. 언어 그 자체에서 명시적으로 드러나는 의미의 전달과 반응을 살피는 데에 대화의 목적이 존재한다.
  ②는 꽤 친한 친구들이 오랜만에 만났거나, 혹은 어제 만났다가 또 만났거나, 아니면 늘상 같이 살면서도 밥때가 되면 나누는 말이다. 흔히 경상도 사람들만이 ‘밥 묵었나?’라는 말을 주고받는다는 오해가 있지만, 한국 사람이라면 졸라 빈번하게 주고받는 말이다.
  이 짧은 말 속에는 상당한 의미가 들어있다. ‘밥(목적어)+먹다(서술어)+서술과거형+의문문’이라는 문장을 구성하는 것 이상의 ‘무언가’가 있다는 것이다. 그 무언가는 이 말을 주고받을 때 마음속에 떠오르는 느낌일 수도 있고, 엄청나게 오랜 기간동안 교제해오는 동안 쌓은 우정일 수도 있고, 혹시 아버지와 아들이 나누는 대화라면 말이 길어질수록 쑥스러움이 증가하는 관계의 특성상 그 ‘숨어 있는 말’ 속의 뜻을 응축해 놓은 감정일 수도 있다.
  ③은 좀 독특하다. 사실 ①과 ②의 말 속에 나타난 특성이 동시에 있다고 말하기에 무리가 있다고 할 수도 있지만, 어쨌거나 단순한 표층적 의미 전달에 머무르는 부분도 있고 둘 만이 아는 무언가를 나누는 부분도 존재한다. 예문으로 삼기에 아쉬운 점, 혹은 방금 언급한 것처럼 ‘무리’가 있다고 한 것은 ①과 ②의 부분이 분리되어 나타나기 때문이다. 사실 ③의 가장 좋은 예는 ‘섹스(왜 섹스의 순우리말은 없는 걸까)’가 될 텐데 예문으로 어떻게 표현할 수가 없으니까 그냥 다른 것을 썼다. 어쩔 수 없잖아. ‘③음, 아아, 우우’ 뭐 이렇게 쓸까?
  섹스가 ①과 ②의 말에 나타난 요소를 동시에 갖고 있다고 표현하는 것 보단, 둘의 구분이 매우 모호하게 나타나는 대화의 한 양태인 것 같다. 섹스라는 행위에 나타나는 언어적 요소들을 그대로 서술하면 ‘외설(보다는 야설이 가깝겠구만)’이 되어버리는 까닭은, 바로 언어를 통해서는 담을 수 없는 ‘무언가’가 섹스 속에 있기 때문이다. 님들은 무슨 말인지 대충 알겠죠?
  ③의 또 다른 예는 종교적 가르침이 전수되는 과정이다. 기독교는 문외한이니까 차치하고, 최근 열심히 배우고 있는 불교의 예를 좀 들어볼까.
부처님 생전에 설법을 하기 위해 많은 대중이 모인 적이 있다. 그때 부처님은 한참 동안 말이 없으시다가 연꽃을 한 송이 들어보였다. 이 때 그 자리에 모인 수많은 사람들이 어리둥절해 했으나 오직 가섭존자만이 그 뜻을 이해하고 웃음지었다 한다.
  이건뭐... 라는 말이 절로 나오는 장면이지만, 그렇다고 이것을 허무맹랑한 것으로 치부하기에는 뭔가 부족한 감이 있다. 문자를 통해서 할 수 없는 것을, 즉 말이나 글로서는 도저히 전달할 수 없는 것을 우리가 알지 못하는 어떤 무형의 방법을 통해 이루어낸 것이다. 사실 가섭존자의 일화에서 과연 ‘언어’라는 부분이 존재했는가 하는 의문이 제기될 수 있는데, 비록 부처가 꽃을 들어보인 것과 가섭존자가 그 의미를 파악한 것 사이에 직접적인 연관관계가 없다 하더라도 ‘꽃을 들어보이는’ 언어적 행위가 언어로 표현할 수 없는 ‘가르침’을 불러일으켰다는 점만은 부인할 수 없다. 물론 내 생각이지만.

  사실 지금까지 이야기한 건 서론에 해당되는데, 왜냐하면 아직까지 나는 ‘대화’보다는 ‘언어’에 초점을 맞추어 논의를 진행시켜왔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내가 할 말은 대충 다했다. 이건 다음 그림을 보면 알 수 있다.

<그림2 참조>

  어쨌든 여기 모인 사람들은 수능을 봤거나, 고등학교든 대학교에서든 철학 수업을 들은 사람들일테니 기표와 기의 얘기는 한번 쯤 들은 적이 있으리라 믿는다. 그림 제목에 약간의 어폐가 있으나(소쉬르의 구조주의언어학이 기표와 기의만을 이야기하는 것은 아니기 때문에) 아무튼 내가 하려는 이야기는 기표와 기의에 대한 것이고, 나는 언어학에 대해 아는 게 거의 없지만 어쨌든 개념을 빌려오면 누가 그 말을 했는지 쯤은 밝혀주는 게 예의니까 그림 캡션을 저렇게 썼다.
  소쉬르가 파악한 언어구조와, 소위 ‘쌀’이 파악한 대화의 맥락 속에서 나타난 언어의 구조는 다르다. 정확하게 분류하자면, 내가 파악한 언어의 ‘겉’은 소쉬르의 ‘기표’와 ‘기의’를 모두 포함한 언어의 표면적인 활용을 모두 포괄하는 개념이다. 또한 기표와 기의의 개념은 언어학의 맥락에서 사용된 것인 반면에, 쌀이 구분해놓은 언어의 이중구조는 순전히 커뮤니티 봄의 세미나를 위해, 그것도 ‘대화’라는 첫 번째 세미나 주제에 완전히 최적화된 아조 독창적인(한마디로 학술적 가치가 거의 제로에 가까운) 개념이다 이 말씀.
  현대사회는, 한마디로 말해서 겉이 중시되는 세상이다. ‘겉’도 중요하지만 ‘속’도 중요해, 하는 뻔한 말을 옳다고 하는 것조차 부끄럽다. 원더걸즈가 왜 뜨는걸까? 왜 이우학교에서는 선거철만 되면 ‘소통’이 가장 큰 화두로 떠올랐던 것일까(이번에도 그렇던데...)?
  이 글에서 왜 요즘 동네는 ‘겉’이 중시되는 것인지, 그것이 구체적으로 어떻게 우리 삶을 지배하는지에 대해서는 이야기하지 않겠다. 그것을 다 이야기하려면 공부 엄청 해야 하지 않을까? 물론 내 짧은 생각일 수도 있지만. 어쨌든 그건 소위 경제학자들이나 사회학자들이 열심히 분석하리라고 믿고 있다. 아니면 철학자들도.
  우습게 들리겠지만, 내가 보기에는 대화의 ‘겉’보다는 ‘속’이 중요한 것 같다. 아니, ‘속’이 대화의 전부이라고 본다. 왜냐하면 우리가 ‘겉’껍데기 뿐인 대화를 추구하는 것은 사실 ‘속’을 향한 갈망이 원인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속’과 ‘속’을 연결하는 대화를 하는 법을 빠른 속도로 잃는 것이 공동체가 붕괴된 곳에서 나타나는 현상이다. 말하지 않아도 ‘아는’, 그런 관계를 찾는 것은 매우 어렵다. 만드는 것도 어렵다.
  아프리카의 초원에서 사는 부시맨들은 별들의 노래를 들을 수 있다고 한다. 그들과 함께 오랜기간 생활한 어느 인류학자조차도, 그것만은 할 수 없었다.

  “저에게는 별들이 노래하는 소리가 들리지 않습니다만.”
  “정말입니까? 그럴 리가 없습니다. 귀를 기울여 보세요, 별들이 노래하는 소리가 들리지 않나요?”
  “... 들리지 않는군요.”
  “정말 안타깝군요, 이렇게 아름다운 별들의 노랫소리가 들리지 않는다니. 그건 정말 안타까운 일입니다.”

  우리가 대화를 할 때 상대방의 언어 뒤에 숨어 있는 노랫소리가 들리는가? 아니, 사실 우리스스로가 말을 할 때조차도 그런 ‘보이지도 들리지도 않는’ 노랫소리를 담아낼 수 있을까?
  이 이야기가 참 생뚱맞다는 걸 안다. 한가한 소리나 하고 있군, 하고 여길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어쩐지 나는 내 이야기가 맞다고 우기고 싶다. 우리가 이 자리에 모인 까닭도, 그리고 이 자리에 모여서 서로 나누고 있는 것은 바로 그 ‘속’에서 연유한 무언가가 아닐까.
  그냥 내 생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