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1. 대화. 첫 번째. (정리 : 윤율리)

참가 : 정지윤, 김정현, 조한비, 권민택, 이지은, 윤준혁, 석대범.


  A : 대화엔 2가지 조건이 있다. 먼저 상대가 있어야 하고 대화를 할 도구가 필요하다. 후자는 가변적이지만 전자는 필수적인 요소다. 결국 대화는 상대방과의 소통이다. 포스트 모더니즘의 주체는 존재자들의 관계성에 주목하는데 사람들 사이의 대화는 이 변화를 잘 따라오지 못하고 있다는 느낌이 든다.

  B : 소쉬르가 얘기했듯이 대화에도 겉과 속이라는 두가지 측면이 있다. 직접적인 겉의 대화는 살아남았지만 속의 대화는 그렇지 못하다. 현대 사회에서 자꾸만 소통이 강조되는 것은 곧 진정한 의미에서 소통(속의 대화)이 사라졌다는 반증이다. 원더걸스의 <Tell me>가 히트를 쳤다. 가섭존자와 붓다의 소통과 비교한다면 얼마나 대조적인 노랫말인가. 자본주의와도 관련이 있을듯 한데...
  C : 단순히 자본주의와 관련 있다기 보다는 뭐든지 빨라야 한다는 강박 때문 아닌가? 일상의 대화에도 여유의 틈이 없지 않나. 이런 상황들이 함께 고려되어야 한다.
  A : 빠른 것과 자본의 논리는 결국 같은 얘기인 것 같다.
  D : 내가 보기엔 다르다. 대화의 의미가 너무 피상적인데 엄정한 의미에서 커뮤니케이션과 소통을 구분해야 한다. 어원적으로도 전자는 집단적이고 후자는 개인적이다. 선문답을 생각하면 소통의 이해가 쉽다. 가섭존자의 연꽃처럼 속에서 활짝 피어오른 이해랄까.
  B : 그렇다면 소통은 상관관계라 할 수 있겠다. 관계는 있지만 인과는 모호한. 아까 이야기 했던 속의 대화는 소통이라 보는게 좋을 것 같다. 커뮤니케이션은 실험연구쯤 되는건가.
  D : 정확하다. 현대 사회의 경우 대부분의 소통은 일정한 룰로 대체된다. 가령 횡단보도에서는 굳이 운전자와 소통할 필요 없이 신호등이라는 룰을 따르면 된다. 반면 상대적으로 이런 룰이 취약한 베트남에서는 길을 건널때 모든 사람이 일대일로 소통해야만 했다. 아주 필사적으로! 오히려 이것이 더 안전하고 인간적이다. 물론 일장일단은 있겠지.
  B : 룰이 소통을 옅어지게 만든거군.

  A : 커뮤니케이션과 소통의 구분은 좋은 지적이다. 그러나 자본주의와 빠른 것이 다르다고는 생각할 수 없다. 실제로 자본주의가 인간의 모든 일상을 지배하진 못하지만, 일상을 지배하는 거대한 가치를 근본적으로 지배하고 있다. 이건 같은 이야기 아닌가. 그만큼 많은 것들이 사물화 되었다.
  C : 자본이란게 참 뭐하다. 돈을 죽일 수도 없는 노릇이고...
  D : 경우는 다르겠지만 러다이트 운동이 생각난다. 사실 그건 노동자들의 완전한 착각이었지만 어떻게 보면 가장 적절하고 정확한 저항 아니었을까.

  A : 대화의 개념을 비교적 명확히 하는데 성공했다. 소통의 부재라는 문제의식에 다들 동의했는데, 각자 생각을 정리한 후에 진정한 소통이 어떻게 가능할 것인지에 대해 얘기해 보는게 좋겠다.


(휴식)


  A : 말이나 글의 소통방식은 직접적이다. 어떤 미사여구로 포장되더라도 문학이 되지 않는 이상 그렇다. 반면 예술의 소통은 보다 간접적이다. 도달하는 속도는 느리더라도 파장은 훨씬 크다. 새로운 소통의 가능성으로 예술을 제시해보고 싶다. 이에 대해 예술가들의 입장이 궁금한데.
  E : 개인적으로는 소통을 목적으로 한 예술을 고민하지는 않는다.
  C : 힙합이란 장르는 소통에 최적화 되어 있다. 애초에 사회적 메시지를 담은 저항 운동으로 시작 되었고, 그게 내가 힙합을 선택한 이유다. 그러나 대부분의 사람들은 멜로디 안에 들어있는 가사를 그저 부수적인 것으로만 취급한다. 이 둘을 어떻게 조화시킬지 고민 중이다.
  E : 확실히 힙합클럽에서 단지 메시지(소통)에 열광하는 사람은 없겠지.

  F : 하지만 예술가가 작품에 특정한 메시지를 담았다고 해서 그게 언제나 관객에게 제대로 전달되는건 아니다. 이런 경우는 어떻게 봐야 하나.
  B : 그렇다면 그건 실패한 예술 같은데.
  F : 동의할 수 없다. 일부러 의도된 중의성도 예술의 한 기법이다.
  C : 책임의 문제로 접근해 봐야할 것 같다. 예술 작품을 생산한 자가 스스로 책임을 질 수 있다면 어떠한 해석으로도 최초의 의미는 절대 훼손되지 않는다. 그러나 아무리 좋은 메시지를 효과적으로 전달했다 해도, 작품에 대한 책임을 회피한다면 상대적으로 질이 떨어지는 예술이다.

  A : 해석과 받아들임의 문제는 포스트 모던 예술의 가장 첨예한 화두 중 하나다. 뒤상이 물꼬를 텄고 바르트가 결정타를 날렸다. 해석은 독립적으로 열려 있는게 좋지만 너무 풀어져서도 안된다. 작품을 읽는데에 있어 작가를 열쇠로 쓸 수 있어야 한다. 존 레논의 음악이 감동적인 것은 그의 인격과 가치관과 삶 전체가 동시에 오버랩 되기 때문이다.
  D : 베이컨의 그림을 보면서 작가 자체를 해석의 열쇠로 쓰기는 힘들 것 같다. 그러나 분명 그는 뛰어난 예술가다. 이것을 어떻게 설명할 건가.
  A : 전혀 불가능하다고 보지 않는다. 베이컨의 그림은 언제나 시크하고 차갑다. 작가로서 그에게서도 비슷한 아우라를 읽어내지 못한다고 보기 힘들다.
  D : 그런 일차적인 느낌들은 굉장히 표면적인 것이다. 수긍할 수 없다. 게다가 존 레논의 음악은 애초에 직설적인 메시지를 담은 것이 대부분이었다. 예술 안에서 이루어지는 소통이 간접적이라 했는데, 직설적인 메시지성이란 결국 그에 모순되는 요소 아닌가.

  E : 개념 정의가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았다. 서로가 생각하는 메시지가 조금씩 다른 의미로 쓰이고 있다. 대치되는 것 같으면서도 사실은 대치되는 부분이 모호한 논쟁이다. 다음 주제부터는 용어들을 먼저 정리하는 시간을 갖는게 좋겠다.
  A : 난 기본적으로 순수예술이 공허하다고 보는 효용론자다. 이런 입장의 차이에서 간극이 발생했다.
  D : 무엇이 옳고 무엇이 그르다고 말할 수 있는 문제는 아니니까.

  C : 개념 정의 과정은 필요하겠지만 그것이 섣불리 하나의 목소리가 된다면 곤란하다. 주의를 요하는 작업이다.

  A : 의미있는 소통을 위한 대안으로 주로 예술에 대해 이야기 했다. 우선 예술을 대하는 태도들에 확실한 차이가 있다. 꽤 타이트하게 몰아와서 더이상은 좁힐 수 없다. 이쯤에서 매듭을 짓고 각자 정리를 할 시간이 필요하다. 다음 시간에는 저마다의 이해에 따른 결과물들을 가져와 보기로 하자.


(마침)